박혜란/

여성학자

그냥 그 청년이 너무 불쌍해서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차근차근 자기 인생을 가꾸어가던 그가 너무 아까워서다.

그가 풍족치 않은 집안을 원망하며 마구 살았던

청년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슬프지 않았을 거다…

앞날을 지켜주지 못한 부모 세대로서 죄스러움과

미안함 때문에 마냥 눈물만 솟는다

김선일씨가 피살되었다는 뉴스를 전해 들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밥 해 먹을 생각도 없고 책도 못 읽겠다. 워낙 요동이 심한 세상에서 살다보니 웬만한 일엔 내성이 쌓인 체질인데 이번은 다르다. 아무리 심각한 사건도 하룻밤 자고 나면 아득하게 느껴지곤 했는데 이번은 거꾸로다. 날이 갈수록 가슴의 통증이 더 심해져 간다.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던 그 목소리가 내내 귓속에서 웅웅거린다. 학사모를 쓰고 찍었던 그 반듯한 얼굴과 마지막의 그 초췌한 얼굴이 겹쳐진 채 눈 앞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내 가슴이 이렇게 아픈 이유는 무고한 국민이 테러리스트의 손에 참혹하게 죽어가는데도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한 국가에 대한 분노 때문도, 그리고 다 큰 자식을 어이없게 잃은 부모에 대한 연민 때문도 아니다.

그냥 그 청년이 너무 불쌍해서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차근차근 자기 인생을 가꾸어가던 그가 너무 아까워서다. 그가 풍족치 않은 집안을 원망하며 마구 살았던 청년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슬프지 않았을 거다. 오로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전쟁터에 들어섰지만 결국은 엉뚱한 희생양으로 바쳐진 그 운명이 한없이 비통하기만 하다. 납치되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가 혼자 겪어냈을 외로움과 두려움을 헤아리면 가슴이 쪼개질 것만 같다. 게다가 그는 딱 내 아이들 또래가 아닌가. 앞날을 지켜 주지 못한 부모 세대로서 죄스러움과 미안함 때문에 마냥 눈물만 솟는다.

슬퍼하는 일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더 힘이 빠진다. 애초부터 꼬인 전쟁이었다. 이제 와서 파병반대의 목소리를 가일층 높인다 해도 쉽게 돌이켜질 일이 아니다. 수렁인 줄 뻔히 알면서 같이 끌려 들어가야만 했던 처지가 답답하다. 개인이건 국가건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기란 너무나도 지난한 과제이다.

그 날, 저녁에 집에 있으면 또 뉴스를 보고 또 그의 얼굴을 보고 울게 될까봐 나는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촛불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화문으로 가는 대신 내가 간 곳은 인파로 넘치는 거리에 자리잡은 영화관이었다. 그리고 내가 고른 영화는 미국이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슈렉2>였다.

전쟁영화는 안 본 지 오래 되었다. 어렸을 때 존 웨인이 나온 서부영화를 보면서 악독한 인디언이 거꾸러질 때마다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던 기억은 지금도 가끔씩 내 얼굴을 붉게 만든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부터 전쟁영화는 도저히 보아낼 수 없게 되었다. 좋은 편이든 나쁜 편이든 청년들이 죽어가는 장면은 나를 고문하는 것 같았다. 최근 천만 명이 넘게 보았다는 두 편의 영화도 보지 않았다.

역시 예전에 좋아했던 공포영화도 점점 멀어져 갔다. 현실에서 나날이 느끼는 공포도 힘에 겨운데 굳이 영화에서까지 맛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영화 속의 공포가 우스꽝스럽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지금 내가 영화에서 얻고 싶은 건 작은 위안일 뿐, 전쟁의 스펙터클도 공포의 서스펜스도 내겐 너무 무겁다.

과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전쟁도 공포도 없이 그저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만 보였다. 요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하려는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집착까지 벗어 던졌다. 웃다 보니 눈물까지 났다.

그러나 온통 젊은 사람들에 밀려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다시 그 청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나는 살고 싶어요.

선일아,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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