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는 무조건 남성? ‘미동의’ 60%
평소 고인 신념대로 비건식 대접도
여전한 남성 중심 장례문화 사례…
빈소 전광판엔 아들이 딸보다 먼저
상주·운구 역할은 주로 남성이 맡아
부조금 받는 자리엔 여성 대신 남성
여성은 치마 수의, 남성은 바지 수의

검은 정장에 트렌스젠더 플래그 뱃지를 단 홀릭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사진=본인 제공
검은 정장에 트렌스젠더 플래그 뱃지를 단 홀릭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사진=본인 제공

남성 대신 여성이 완장을 차고 상주가 되거나 육개장 대신 비건식으로 조문객을 대접하는 등 장례문화가 바뀌고 있다.

아직 성차별적인 장례 문화는 존재한다. 고인의 빈소를 알리는 전광판엔 아들이 딸보다 먼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보통 배우자-아들-사위-딸-며느리-손자 순이거나 배우자-자-자부(아들의 아내)-녀-사위-손 순이다.

관례에 따라 장례식을 주관하는 상주 역할은 주로 남성이 한다. 예를 들어 딸만 있는 집은 사위, 남자 형제, 조카 등이 맡는다.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 ‘이제는 바꿔야 할 의례문화_장례편’ 캠페인에 참여한 김모씨(40·여)는 “장례식장 담당자가 부고를 작성하러 아드님이 내려오라고 했다. 우리는 딸만 넷이라 했더니 사위님을 보내라고 했다”며 “큰 언니가 상주를 할 거라고 하자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조카라도 계시면 그분이 서시는 게 모양이 좋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정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한국여성의전화 ‘성차별적 장례문화 타파하기 교육’(https://t.co/qxxMivT4Mg) 에서 여성이 상주가 되는 경우 장례업체 측에서 조문객이 적게 온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정 활동가는 “한국여성의전화 회원이나 여성 활동가의 장례를 할 때 보면 여성이 상주가 되는 경우 조문객이 적게 온다고 취급한다”며 “빈소를 크게 마련하지 말라는 이상한 권유를 받는 경우도 많다. 바뀌어야 하는 이상한 지침”이라고 지적했다.

사진=가수 이랑씨 인스타그램 캡처
가수 이랑씨는 지난해 언니의 장례식에서 상주 양복을 입고 완장을 찼다. 사진=가수 이랑씨 인스타그램 캡처

여성은 부조금을 받는 자리에도 앉기 힘들다. 캔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는 “저희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부조금함 자리에 사람이 비어서 앉아 있었는데 친척 어른이 ‘여자애가 왜 여기에 앉아 있냐’고 혼났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주은(27·여)씨도 같은 경험을 겪었다. 김씨는 “친할아버지 장례식에서 부조금을 받는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아버지가 저 대신 장손인 사촌 남동생이 앉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며 “당시 성차별을 느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고 토로했다.

맨 앞에서 영정사진을 들거나 관을 운구할 때도 남성이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양모씨(33·여)는 “삼촌과 아빠가 동생에게 할머니 영정사진을 들라고 했다. 사진은 손주가 드는 것이란다”며 “영정사진은 내가 들고 싶었다. 손주가 들어야 한다면 할머니와 가장 오래 함께했고 가장 많은 추억이 있는 내가 제일 어울리지 않나”라고 얘기했다. 작년 각별한 동성애자 친구를 떠나보낸 홀릭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는 “고인의 친구들 대부분 여성이었고 우리가 관을 드는 것으로 협의했더니 운전기사님이 ‘수많은 장례를 봤지만 여성이 관을 드는 모습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며 “요즘은 장례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보통 관을 드는 사람은 남성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 얘기했다.

고인의 경우 여성은 치마 수의, 남성은 바지 수의를 입히는 관행도 있다. 홀릭 활동가는 친구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신경 쓴 부분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는 “친구는 부치(Butch)였고 생전에 화장이나 화려한 것을 즐겨 하지 않았으며 단정한 것을 좋아했다”며 “장례 과정에서 친구들과 신경 쓴 부분 중 하나는 입관할 때 치마 수의를 입히지 않을 것, 색조 화장을 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바지 수의를 입히기 위해 장례지도사와 유가족의 협의 과정을 거쳤다”며 “생전에 고인이 치마 입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결국엔 바지 수의를 입히기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지난 2020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장례 경험이 있는 20~50대 131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상주는 남성이 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60%였다. 사진=한국여성정책연구원

남성 중심이었던 장례 문화도 균열이 가고 있다. 장례식의 관례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었던 이들이 인식을 달리 하고 있기 때문. 지난 2020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장례 경험이 있는 20~50대 131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상주는 남성이 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60%였다. 가수 이랑씨는 지난해 언니의 장례식에서 양복을 입고 완장을 찼다. 이씨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빈소에서 여자는 상주를 못한다 하기에 일단 ‘저 여자 아니다’라고 했더니 바로 완장과 양복을 줬다”고 밝혔다. 또 그는 장례 행렬 맨 앞에서 언니의 영정 사진을 들었다.

장례 업계도 여자 상주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보훈상조는 “여자 상주가 아예 불가능하진 않다. 고객 중 여성 상주를 맡아 완장을 차고 싶고 치마저고리 대신 정장을 입는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며 “요즘엔 상주를 나타내는 완장 대신 상복에 모두가 착용하는 근조리본 문화가 있다. 근조리본엔 딸, 아들이라고 적혀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 고인이 된 성소수자 친구의 제사상. 사진=홀릭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지난해 6월 고인이 된 성소수자 친구의 제사상. 사진=홀릭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육개장과 편육 대신 비건식으로 조문객을 대접하는 사례가 생기자 장례식에 비건도시락을 파는 업체도 등장했다. 박모씨(26·남)는 “빈소에서 논비건 식사가 제공됐는데 비건이었던 고인이 자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을 원할 리가 없었다”며 “우리 일행은 모두 식사를 사양했고 상조 직원분들은 우리를 의아하게 쳐다봤다”고 얘기했다. 비건도시락 업체 러빙헛랜드는 “평생 채식을 하셨던 고인을 위해 비건도시락 주문이 들어온다”며 “비건 장례문화가 생겼다며 조문객들의 반응도 좋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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