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서울 종로구 일대서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
친족성폭력 생존자들 공개발언·행진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등
법안 쌓여가는데 국회는 잠잠

친족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 약 100명이 29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고 행진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친족성폭력공소시효폐지를위한공폐단단 등이 공동 주최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친족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 약 100명이 29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고 행진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친족성폭력공소시효폐지를위한공폐단단 등이 공동 주최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부모님들, 피해자의 입을 막지 말아 주세요. 부모의 체면보다 피해자의 생명이 더 중요함을 잊지 마세요. 국가는 피해자 관점에서 법률을 고쳐주세요.”

‘오빠 성폭력’ 생존자 심이경 작가가 외쳤다. 29일 서울 종로 일대에서 열린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 14세에 겪은 성폭력과 치유 과정을 담은 책 『나는 안전합니다』를 최근 펴낸 심 작가는 이날 사람들 앞에 서서 다른 생존자들에게 따스한 응원을 전했다. 

자신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친척을 향해 용감하고 당당한 메시지를 보낸 여성도 있다. “네가 출소하자마자 찾아올까 봐 무서워서 숨어 지내려고만 했는데 이제 너에게 내 소식을 전할 만큼 용기가 생긴 것 같아. 나는 반성매매 상담소 활동가이자 성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어. 내가 사랑하고 지켜줘야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도담)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은 성폭력의 사각지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입소인의 75%는 친족성폭력 생존자다. 가해자들은 힘 없는 어린아이나 청소년을 주로 노린다. 친족성폭력 피해자의 85%가 만 19세 이전에 피해를 겪었다(한국성폭력상담소, 2021). 

친족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 100여 명이 이날 ‘생존자랑대회’를 연 배경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친족성폭력공소시효폐지를위한 공폐단단, 군포여성민우회, 부천여성의전화, 서울강서양천여성의전화, 성소수자부모모임, 장애여성네트워크, 피스모모 등이 공동 주최했다.

친족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 약 100명이 29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친족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 약 100명이 29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친족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 약 100명이 29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친족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 약 100명이 29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이날 집회는 “살아 돌아온 자가 분노와 슬픔을 잠시 뒤로 하고 각자의 삶을 자랑”하는 시간이었다. 모두가 해골 가면, 꽃, 장식으로 치장했다. 멕시코 축제 ‘죽은 자들의 날’과 그 상징인 칼라베라 카트리나(꽃 등으로 치장한 해골)에서 영감을 얻었다.

중학생 때까지 아빠에게 성폭력을 겪은 유민도 무대에 섰다. “회복하기 위해 성실히 애써온 나를 칭찬합니다. (...)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강력한 여성으로 자라 가해자의 세계를 박살 낼 것입니다. 모든 생존자들의 삶을 칭찬하고 응원합니다.” 

“피해자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의 고통은 영원하지도 무의미하지도 않을 겁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스스로를 치유하고 고통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꿀 만큼 강합니다.” (심이경 작가)

“(친족성폭력) 범죄는 여성억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 소유한 여성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 (...)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더이상 사회의 시선에 지지 않고 당당히 거리로 나오는 세상을 원합니다.” (이브)

친족성폭력 고발 이후 가해자에게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으나, 한국여성의전화 등의 지원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은 생존자 ‘귤색’은 “절실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겼다”, “친족성폭력은 친족이라는 사슬 아래 무덤까지 상처를 안고 가는 잔인한 범죄임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활동가 ‘수수’는 “(정부는) 여성가족부 폐지로 눈을 가릴 것이 아니라,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에 묶이지 않고 피해를 회복하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강서양천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 활동가 ‘행복’은 “친족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피해자가 언제라도 용기를 내어 가해자를 고소할 수 있도록 친족성폭력 공소시효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 피해자를 2차 가해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주거, 의료 및 상담, 취업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백혜련 장애여성네트워크 대표, 하늘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 등도 연대 발언을 했다.

친족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 약 100명이 29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친족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 약 100명이 29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행진하며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와 인식 개선 등을 촉구했다. “가해자를 고발한다, 아빠 오빠 삼촌 사촌! 괴물도 악마도 아니다, 평범한 인간이다! 국가를 고발한다, 피해자 인권 보장하라!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하라!” 

단막극 형식의 퍼포먼스도 벌였다. 모든 참여자가 “그때의 나,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피켓에 적고 소리 내어 낭독했다. “괜찮아, 혼자가 아니야”, “네가 최고야 사랑해!”, “그 선택은 언제나 최선이었어”,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잘 살자 오래오래!”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축하 공연도 열렸다. 그는 “10년 전 친족성폭력 피해자 쉼터에서 청소년들과 노래 만들기 수업을 했다”며 자신의 노래 ‘늑대가 나타났다’를 ‘생존자가 나타났다’로 개사해 불렀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등
법안 쌓여가는데 국회는 잠잠

그러나 법제도의 변화는 더디다.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9월 친족성폭력 범죄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청주 계부 성폭력 사건’ 항소심 선고 이후에도 관련 개정안 발의가 이어졌다. 지난 6월, 이수진 민주당 의원은 친족성폭력 피해 아동이 명시적 의사를 표시하지 않아도 보호조치 개시를 허용하는 내용의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을, 김선교 국민의힘 의원은 친족성폭력 가해자와 피해 아동청소년을 분리하는 내용의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앞서 2021년에는 무소속 양정숙 의원이 친족성폭력 범죄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형석 민주당 의원은 친족성폭력 사실을 알게 된 친족이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할 경우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성폭력방지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정춘숙 민주당 의원은 2020년 미성년 친족성폭력 피해자가 보호시설에 입소해도 가해자에게 괴롭힘당하는 일을 막고자, 시설 입소기간 동안 부모의 친권을 정지하는 내용의 보호시설에있는미성년자의후견직무에관한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모두 소관 상임위원회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은 앞으로도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촉구하는 정기 1인시위 등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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