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잠깐 만났던 사람도 다시 만날 양이면 언제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양으로 만났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를 정확하게 떠올랐다.

영화를 보고 나면 내용은 물론, 감독 이름, 배우 이름까지. 심지어 배우가 이전에 어떤 이름으로 출연했었는지도 줄줄이 읊어댈 수 있었다. 정말 '영민'하던 시기에는 소설의 구절을 옮겨 적을 수도 있었고, 시는 전문을 외웠고, 노래는 못 불러도 가사는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졌다. 누군가 기억 못 하는 사실들을 정확하게 일러줄 때는 정말이지 으쓱할 정도로 자랑스러웠다. 농담처럼 '걸어다니는 사전'으로 불릴 때는 아주 지적인 인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이 모든 것들이 과거 일이 되어버렸다. 가장 경악할 일은 작년쯤에 일어났다. 만난 걸로 치자면 한 댓 번, 차도 마시고 밥도 같이 먹었던 사람이었다. 한 달 정도 뉴질랜드로 여행을 다녀온 지 열흘쯤 지났으려나. 극장 앞에서 영화 시작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사람이 다가와 나를 보고 웃었다. 분명 아는 얼굴인데 이름도, 뭐 하는 사람인지도, 언제 만났는지도 전혀 떠오르질 않았다. 좀 이야기하다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누구시죠? 저희 책 독자신가요? 그 사람이 그쯤에서 장난을 그만두었더라면 괜찮았을 것을. 난감해하는 내게 그는 말했다.

우리 며칠 전에 뉴질랜드에서 만났잖아요? 거기 다운타운에서. 나의 칼럼을 모두 읽은 그가 이미 읽은 글로 놀리는 것조차 모르고 나는 완전히 기함하고야 말았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사람이구나, 그럼 나는 열흘 전의 일도 기억을 못 하는 거구나. 갑자기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나중에야 그의 장난을 알았지만, 그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후 그것이 무슨 신호인 양 그때부터 기억력은 급격하게 쇠퇴해버렸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다시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봐도 봐도 다시 만나면 이름과 얼굴이 매치가 되질 않았다. 실수가 계속 이어졌다. 처음엔 난감했고, 나중엔 무안하고 민망해졌고, 결국엔 슬퍼졌다. 내가 완전히 '삔'이 나갔나 보다, '맛이 갔나 보다',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워졌다. 누구도 먼저 아는 체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머리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고약한 느낌이었지만 꽤 의기소침해 진 것은 사실이다. 얼마 전 여행을 가서 새 얼굴들을 만났다. 별이 빛나는 밤에 나와 앉아 나이와 건망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내 또래였다. 이러다가 전설로 떠도는 이야기처럼 다리미를 전화로 오인하고 귀를 확 다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내 말에 그들이 말했다. 나는 위로받았다.

“너무 연연하지 말아요.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우리도 그래요. 나이가 든 탓도 있지만 그것도 한때겠지. 너무 의식하면 더 심해질 거야. 몸도, 뇌도 파업할 때도 있나 보다 생각해. 흐르는 대로 두어서 버릴 것은 버려야 새로운 것도 들어올 테니까. 그냥 두어요.”

권혁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편집위원

sumatriptan patch http://sumatriptannow.com/patch sumatriptan patch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