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고문부터 역고소까지 여성연대 계속된다

'권인숙 사건' 도화선…여성·시민·종교단체 가세 대책위 결성

아동 근친간 성폭력·성희롱·학내 성폭력 등 스펙트럼 다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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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열린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백서 출판 기념회. 최영애 국가인권위 사무총장,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이상덕 당시 청와대 여성정책 비서관(현 안성기능여대 학장) 등이 참석했다.

우리나라 성폭력근절운동사를 되돌아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86년의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다. 당시 노동현장에 취업하여 노동운동을 하던 권인숙 씨는 '5·3 인천사태'와 관련해 부천경찰서에 체포되었는데, 담당 형사 문귀동은 권씨를 취조하면서 성고문을 가했다. 권씨는 변호사를 통해 자신이 당한 성고문 사실을 언론과 여성단체에 알렸으며 문귀동을 강제추행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했다. 이에 '한국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가 구성됐고, 여성단체·시민단체·종교단체 등이 연합한 '부천서성고문사건공동대책위'가 꾸려져 본격적인 성폭력근절운동이 전개됐다. 이후 권씨는 여성학자로 당당히 '생존'했다.

이렇게 포문을 열게 된 성폭력 근절을 향한 목소리는 91년의 '김부남 사건', 1992년의 '김보은, 김진관 사건'을 통해 94년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당시 30세였던 김부남 씨는 9살 때 이웃집 아저씨에게 성폭력을 당했고, 성장하여 결혼한 후에도 부부관계를 거부하는 등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당시 성폭력 범죄 고소 기간은 6개월이었으므로 공소시효도 훨씬 지나 있었다. 법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김씨는 스스로 가해자를 살해한 후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그 이듬해 발생한 '김보은, 김진관 사건'은 13년 동안 김보은 씨를 성폭행한 의붓아버지를 김씨의 남자친구인 김진관 씨가 살해한 사건이다. 앞의 '김부남 사건'은 어린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공론화시켰고, '김보은, 김진관 사건'은 근친간 성폭력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93년 일어난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은 성희롱 역시 '범죄'임을 인식시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92년 서울대 화학과에 조교로 취직한 우 조교는 첫 출근 이후 지속적으로 지도교수인 신 교수로부터 업무상 불필요한 고의적 신체접촉을 당했고 이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 의사표시를 했다. 그러자 신 교수는 다음해 우 조교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 우조교의 이러한 피해에 대해 총학생회와 대학원 자치협의회, 여성문제 동아리협회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하여 진상을 조사하는 등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신 교수는 오히려 우 조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 후 항소와 상고를 거듭한 끝에 1999년이 되어서야 신 교수에 대한 유죄가 인정돼 우 조교에게 5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이 내려졌다. 이 사건을 통해 96년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어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을 명문화하게 되었다.

장애우 관련단체부터 금기시하던 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성신문>이 2000년 1월 단독 보도한 '강릉 K양 사건'이 바로 그것.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K양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7년간 지속적으로 마을남성 7명에게 성폭력을 당한 끝에 임신하게 됐다. 이에 2000년 1월 지역 28개 단체로 구성된 '정신지체 장애여성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돼 주범 격인 70대 남성이 법정에서 구속당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부산의 Y양, 서울의 E양, 김해의 K양 등 장애여성 성폭력 사건이 속속 표면화돼 2001년에는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이 대구, 부산, 전주, 서울에 '여성장애인 (전문) 성폭력 상담소'를 열기에 이르렀다.

90년대 말 급격히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서강대, 동국대 등 대학 내 성폭력 사건도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 학내 성폭력은 교수-제자 사이에 일어나는 위계질서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 문제와, 학생­학생간 성폭력으로 크게 구분된다. 교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반영해 2001년 서울대에 성폭력 상담소가 설치되었고, 학교 당국은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휘둘러온 가해학생을 제적하기도 했다. 연세대의 경우에는 2003년 '교수 성폭력 토론회'를 열어 수업시간 중 교수들의 성적 언어폭력을 공개 비판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캠퍼스 내 성폭력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캠퍼스 곳곳에 '성폭력 비상전화'설치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성폭력 사건이 공개된 후 가해자가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성폭력 가해자 역고소' 사건은 근래 가장 뜨거운 성폭력 이슈다. '성폭력 가해자 역고소'의 역사는 앞서의 '권인숙 성고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찰은 성고문 사건이 공개되자 “자체조사 결과 허위사실”이라며 권인숙씨를 명예훼손과 무고로 맞고소한 것. 가해자의 역고소는 피해자는 물론 피해자를 지지하는 사람들까지 고소하는 형태로 변화하는 추세로, 성폭력 사실에 대한 침묵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억압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 10월 공개된 전 KBS노조 강 부위원장의 여성노조원 성폭력 사건. 강씨는 피해자 2명과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회원 1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지루한 법정 공방에 들어갔다. 2003년 경산 K대와 대구 K대의 교수 성폭력 사건 당시 이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한 대구여성의전화 전 공동대표 2명도 '사이버명예훼손죄'로 고발당했다. 이처럼 증가 추세인 가해자에 의한 피해자 역고소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2002년엔 '성폭력 추방을 위한 명예훼손 역고소 공동대책위원회'홈페이지(www.ohhno.org)가 오픈 돼 여성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힘을 결집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점차 증가 추세인 사이버 성폭력과 스토킹에 대해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데다가 관련 법과 제도, 대책 등이 미비하다는 점이다.

임영현 객원기자 sobeit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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