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역설에서 묘합의 정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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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교수가 6월 25일 GS 리더(Gender Sensitive Leader) 포럼에서 강연할 원고를 필자의 양해를 얻어 미리 싣는다. 지난해 10월 여성신문사를 주축으로 '성인지적' 관점을 가진 리더들이 결성한 'GS 리더포럼'은 공직자 기업인 문화인 등 사회 각 분야 리더들이 참여하는데, 구성원의 70% 이상이 남성이라는 것이 큰 특징이다.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교수

필자 김광웅 교수는 초대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 시절 관리직 공무원에 여성 30% 할당을 주장한 당사자로, 당시 김송자 노동부 차관, 김경임 외교부 문화외교국장, 김인옥 경무관 등의 고위직 여성 탄생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페미니스트다. 지난 4·15 총선에선 열린우리당의 공천심사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여성대통령 시대를 열기 위해선 여성총리가 먼저 탄생해야 하고, 여성총리가 나오면 여성정책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란 주장으로 주목받았다. 강연 '나는 여성정치인이 싫다'는 여성리더의 자질, 즉 “여성환경 등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보는 능력이 있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평소 그의 소신에 따라 여성정치인에 대한 기대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냥 우연히 이계경 국회의원과 강연 제목을 정하자며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굳이 책임을 진다면 내가 “여성정치인이 싫다”라고 말하는 근거는 이렇습니다. 한마디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부터 내려온 서양 논리의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양의 논리는 위계론적 일관성의 논리이고 동양의 논리는 순환론적 비일관성의 논리라고 해서 이것조차도 이분법입니다.

이분법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 여성과 남성, 아내와 남편,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빈자와 부자 등 둘로 나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 그 자체 현실로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겠습니다.

이념적 논쟁에서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관료주의와 대칭을 이루어 우열을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어떤 명제도 참인 동시에 거짓일 수 없다)과 배중률(어떤 명제도 참이나 거짓 중의 하나이다)을 나누어 참과 거짓을 가려보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를 따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역설에 직면합니다. 크레타 섬의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을 합니다. 그 섬에서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다가 한 쪽 사람이 다른 한 쪽의 사람에게 당신 말이 맞다 하면 거짓말이 참말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참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이것을 '거짓말쟁이 역설'(Cretan's Liar Paradox)이라고 합니다. 스페인의 어느 이발사가 집에서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만 우리 이발소에서 깎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발사는 이발소에 집이 붙어 있어 자신은 수염을 깎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순을 러셀 패러독스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모두는 이런 역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분법의 논쟁이 반드시 옳은가를 이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유는 지난 300년간 이런 식으로 논리를 구사해왔기 때문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별개의 것으로 치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양자 패러다임에 오면 부분은 곧 전체가 되고, 전체 또한 부분이 됩니다. 입장은 뒤바뀌면서 하나가 됩니다. 관찰의 주체와 객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양분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분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효율이 높아지니까 말입니다. 여성이 할 일과 남성이 할 일이 굳이 따로 있다면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둘이 하나가 되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둘이 그저 합쳐 하나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둘은 둘이되 하나가 되는 순서는 이렇습니다. 즉, 각기 하나인 존재(being)가 둘로 합치는 존재되어감(becoming)이 되는 것으로 변화는 이때 일어난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했습니다. 풀어 말하면, 촉매 분자가 화학적으로 합성되는 총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들어 가는 과정자체가 내용을 바꾸어버리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 존재의 원리 때문에 총량은 존재의 단순한 집합보다 커지는 현상이 생깁니다. 이를 생물학에서 반사적 촉매작용이라고 합니다. 여성과 남성 그리고 여와 야가 합치면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보탤 것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보다 내가 너 안에, 그리고 네가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만해가 “만날 때의 웃음(one)보다/떠날 때의 눈물이 좋고(two)/떠날 때의 눈물보다/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다(One)”고 했습니다. one into two 혹은 two into one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고, 율곡은 이를 묘합(妙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묘합의 정치를 주창하고자 합니다.

여성정치인들은 모름지기 남성을 끌어안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여성의 논리만 주장하는 정치인은 이 나라의 정치 발전에서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성 정치인이 싫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까지 정치개혁에 관련된 좋은 아이디어는 다 나와 있습니다. 국가의 여러 정책, 행정에 관한 개편 방안 등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좋은 아이디어가 왜 지금까지 그 개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개선에 기여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체세포만 조작을 하면 유전자가 바뀔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포만으론 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세포군으로서 이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엔 세포막이 있는데 이것이 친수와 배수 등 양쪽 친매성을 갖고 있습니다. 보수가 되다가 진보도 되고 그 반대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존재의 본질을 이 나라에서는 '사쿠라'라고 합니다. 정당을 바꾸면 이단자, 변절자로 몰아 시민단체에서 낙선의 낙인을 찍고 맙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논리입니다.

정치개혁은 지금까지 하던 식으로 대상을 고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법, 제도, 정책의 내용을 수 없이 고쳐보았자 안 됩니다. 관찰자와 그 대상이 따로 없이 하나로 정치리듬, 정치이미지, 그리고 정치파도를 하나라고 생각하고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입장은 이래야 합니다. 이분법의 논리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대통령도 자주와 동맹은 보완관계에 있다고 이제 비로소 말을 했습니다. 야당이 대통령 편을 들 때가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도 여당의 지지만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야당과 더 친할 수 있습니다. 남녀, 여야의 역할을 때로 바뀌어도 괜찮습니다. 축구에서 유상철, 송종국 선수는 수비수 또는 미드필더이다가도 공격수가 되어 골을 넣습니다. 물론 적진 편에 서지는 않습니다.

나는 아침 식탁을 내가 차리고 아내는 저녁 식탁을 차리기 때문에 우리가 앉는 식탁의 자리는 조석으로 달라집니다. 역할따라 자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엔 이중역할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대학도 이중 삼중 전공을 인정하는 추세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낙서하지 마시오”라고 벽에 쓰여 있다면 이것은 이미 낙서가 된 것입니다. “조용히 하세요”라고 누가 큰 소리로 말했다면 이것은 이미 소음입니다. 대통령이 연세대 특강에서 보수를 매도하고 폄하하며 “보수란 힘있는 자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이미 보수가 되어 버린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역설 속에서 삽니다. 그러니 제발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를 보고 정치를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여성 자신은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여성은 남성의 시각으로, 남성은 여성의 시각으로? 잘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으로도 충족할 수 없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과 남성이 하나인 시각으로 보도록 노력을 합시다. 그것이 묘합의 정치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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