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영의 침묵을 깨고]
차별과 혐오가 굳어지기 전
안전한 대화의 기회가 필요해
‘다양성과 공존’ 주제로 강의 열고
학생들과 세 학기째 토론해보니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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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그 멀고도 험한 길

애정하는 여성학 연구활동가 선배는 몇해 전 기혼-유자녀-아들맘 페미니스트로서 겪은 양육 경험을 책으로 펴냈다¹. 부제는 무려 ‘양육자를 위한 초등 남아 성교육서’였다. 책을 가득 채운 에피소드들은 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본, 대한민국에서 성평등한 가정환경으로 따지자면 ‘금수저’라 할 만한 그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보통의 초딩 남아’의 거친 언사가 난무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아들에게 불합리로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해서, 기울어지다 못해 새로 진입하는 어린이에게는 아예 반대편이 보이지도 않는 이 운동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선배의 태도였다. 아들을 ‘계몽’한다거나 ‘훈육’하려 하지 않았다. 남성성, 포르노.... 어렵고 불편한 주제를 대화로 풀어나가는 정공법을 택했다. 돌아가더라도 바른 길로 간다는 말은 이럴 때 ‘속 터지는 고난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때만 해도, 선배의 고행기는 그저 안타까운 먼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우리의 외로움에 대하여

당시 나는 공공기관에서 여성 정책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위치에 있었다. 내가 성평등 정책, 성인지 관점, 여성 노동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상대는 주로 공무원 혹은 정책의 직접적 이해관계자였다. ‘초딩 남아’보다야 훨씬 교양있는 말과 정중한 태도로 무장하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딱히 공감이나 동의는 하지 않겠다”로 귀결되는 상황인 것은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제기하는 문제가 모두를 불편하게 하거나, 모두가 웃는 상투적인 농담에 혼자 정색할 수밖에 없는 회의, 포럼에서 나는 대부분 외로웠고, 싸우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무는 때도 많았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을 것이다. 소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ness: PC)에서 벗어나는 말을 해서 ‘빻은 소리’ 했다고 면박을 받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자신은 어쩌다가 그런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갖게 되었는지를 성찰하거나, 그런 뜻이 아니었다면 대체 어떻게 표현했어야 하는지 상상할 기회가 도무지 허락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비난받기 싫어서 침묵을 택하는데,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싸우기 싫어서, 하나를 주장하기 위해 열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싫어서 회피하다 보면 무엇이 남을까. 혹은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싫어서 편한 자리, ‘그대로 되는 자리’만 찾으며 대화를 피하면 어떻게 될까. 대화가 사라진 자리는 오해와 침묵 때로는 혐오에 이르는 것으로 쉽게 채워진다. 외롭게 입을 다무는 대신, 조용히 분노하는 사람이 생긴다. 혐오와 편가르기로 점철된 대선 정국, 연예인의 말실수 하나에도 피아(彼我)를 구분해 가며 논란이 일어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 분노를 볼 수 있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 첫 수업에서 만난 학생들은 또 다른 의미로 나의 입을 다물게 했다. 막연히 기성세대보다는 개방적이고 다양성에 수용적일 거라는 기대는 얼마 안 가 ‘곱게 접어 하늘위로’ 날려 보내야 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학생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여유가 없었다. 군대에 가야 하거나 다녀온 남학생들은 억울했고, 하루가 멀다하고 온오프라인으로 접하는 혐오와 차별에 지친 여학생들은 냉소적이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차별은 공정한가”, “출퇴근 시간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시민의 공익을 해치는 일인가” 같은 주제에 기성세대보다 오히려 더 날선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 태도는 담당 교수만 확인할 수 있는 과제에서, 서술형 답안에서 나타났다. 나는 또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또 침묵해야 할까, 그런데 이 외로움은 나만 느끼는 걸까.

억울함과 냉소로 가득 찬 캠퍼스에서

온라인 게시판으로, 동영상 강의로만 학생들을 만나는 코로나 시기, 학생들이 유일하게 침묵을 깨는 곳이 안전함이 보장된 익명 게시판과 교수만 볼 수 있는 과제 게시판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학생들의 억울함과 냉소가 그대로 차별과 혐오로 굳어지기 전에 대화의 기회가 있다면 어떨까 상상했다. 한 번쯤은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고 ‘내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안전한 대화의 시간과 공간이 확보된다면 말이다.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공존’이라는 과목은 거기서 시작됐다. 이 수업은 정답을 정해두지 않고, PC하지 않은 발언을 해도 판단보다는 경청으로 대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누군가가 억울함을 토로하며 역차별을 이야기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라고 인정해주고,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은 일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작은 변화”를 찾아주려 애쓴다.

지난 두 학기는 온라인으로, 이번 학기는 오프라인으로 ‘다양성과 공존’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학생 약 150명이 참여했고, ‘차별금지법과 표현의 자유’, ‘인종차별과 한류’, ‘수저론과 비정규직 차별’, ‘장애인 차별’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이슈를 다뤘다. 물론 불쑥불쑥 ‘정의로운 답’ 혹은 ‘PC한 결론’을 끌어내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괴롭고 멀리 가는 길이라도 초딩 아들과 대화하는 정공법을 택했던 선배처럼, 쉬운 소재, 찬성과 반대 측의 주장과 근거, 일상 속의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학생들과 대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 지면을 빌어 우리가 나눈 대화를 소개하려 한다. 

다양성과 공존을 위한 대화를 계속하자

한국 사회에서 이미 널리 쓰이는 신조어 ‘맨스플레인’(mansplain)을 이야기한 리베카 솔닛은 이야기하는 것, 대화가 가져오는 역동과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두 이미지와 이야기의 세계에 살고 있고, 대부분은 이런저런 이야기에 상처를 입으며 살아간다. 운이 좋으면, 우리를 받아 주고 축복해 주는 다른 이야기를-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² 우리의 외로움이 가져오는 침묵, 우리를 외롭게 하는 침묵을 넘어서는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그 끝에 다양성과 공존이 존재하는 더 나은 이야기가 있기를 감히 기대하면서.

 

¹ 김서화. <페미니스트 엄마와 초딩아들의 성적 대화>. 미디어 일다. 2018년 3월.

²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김현우 옮김. 반비. 2016년 2월.

 

신하영 세명대 교양대학 교수 ⓒ신하영 교수 제공
신하영 세명대 교양대학 교수 ⓒ신하영 교수 제공

신하영 교수가 2021년부터 세명대 정규 교과목으로 개발해 강의 중인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공존’ 수업의 주요 내용과, 학생들이 참여한 토론에서 나온 생생한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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