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술 한 잔 담배 한 대 권하고한 해 버틸 힘 얻고 와

더위도 같은 더위가 아니군요. 해남의 햇살은 몹시도 따가웠지만 기분을 한껏 부풀려 주었는데 서울의 더위는 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지요.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는 내 몸이 불쌍하네요. 아니, 나야 당신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 공기타령이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은 앞으로 그 긴긴 날을 이런 공기를 마시며 어떻게 살아낼지 걱정입니다. 고정희님, 그래 거긴 요즘 어때요? 당신, 지난 주말은 좀 놀라지 않았나요? 해마다 6월 초면 으레 한 떼의 방문객이 몰려갔지만 이번에는 낯선 얼굴들이, 그것도 아주 많이 찾아 와서 시끄러웠잖아요. 그 큰 버스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어서 나도 놀랐답니다.

당신이 간 지 벌써 13년. 쏟아지는 빗속에서 당신을 마늘밭에 묻으며 눈물을 펑펑 쏟던 게 지금도 생생한데 그게 13년 전의 일이었다니, 그 동안 나는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았는지요.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때 내 속에 담겨 있던 울음을 다 토해낸 탓인지 그 동안 별로 울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그렇게 많이 울진 않았으니까요. 당신의 죽음은 그처럼 뜻밖의 시간에 닥쳐온 하나의 사건이었지요.

당신을 묻고 돌아오던 그 순간부터 친구들은 당신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여성이었으며 좋은 시인이었던가를 당신이 떠나자마자 새삼 깨달았지요. '있을 때 잘할 걸' 하는 후회로 가슴이 아렸지요.

판에 박은 듯한 광주의 장례식에 성이 안 찬 친구들은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당신의 추모제를 열었지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난 처음 알았어요. 말없이 당신을 떠나 보내던 수백 개의 그 슬픈 얼굴들. 당신은 단지 또하나의문화 동인들의 친구만이 아니었더군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백만 여덟 배나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 친구들은 다짐했지요. 당신의 몸은 떠났지만 당신의 혼은 영원히 살려내자구요.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시인으로서 그럴 수 없이 치열하게 살다 간 당신의 삶을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물려주자고. 그래서 그들이 보다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힘을 얻도록 도와주자고.

하지만 남은 자들은 또 얼마나 게으르고 무력한 인간들인지요. 당신이 떠난 지 10년 만에 당신의 이름으로 된 상 하나 만든 게 고작이었습니다. 물론 그 상은 마땅히 받을 만한 여성들에게 주어졌고 수상자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거역할 수 없는 세상의 변화를 절감하고 있지요. 아직도 당신의 평전 한 권 펴내지 못한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만요.

그나마 지금 우리에게 큰 위안이 있다면 당신을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젊은 여성들에게 당신이 매혹적인 선배로 다가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우리의 섣부른 예상과 달리 당신의 시를 읽고 그 시를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나가는 후배들이 늘어간다는 사실에 친구들은 커다란 희망을 찾습니다.

참, 당신의 고향인 해남에서 문인들과 여성들이 당신을 기리게 된 것도 얼마나 기쁜 일인지요. 작년부터 고정희 백일장을 열기 시작했으니 곧 당신의 후배들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올해 이렇게 대부대가 당신을 찾게 된 건 여성기행 코스에 당신의 집(생가와 무덤)을 넣으려는 야심찬 기획의 일환이지요. 솔바람 속에 고요하고 싶은 당신에겐 번거로운 절차일 테지만, 사람 좋아하는 당신, 함박꽃 웃음으로 반겨주세요. 당신에게 술 한 잔 담배 한 대 권하고 한 해를 버틸 힘을 얻어 가는 사람들을 따뜻이 품어주세요.

이런, 당신의 집을 지키는 분, 큰올케도 이젠 부쩍 늙으셨더군요. 당신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소주를 권커니 잣거니 할 수 있을 텐데 너무 아쉽다고 하십디다. 생전의 당신은 술 마시는 내색도 안 했다면서요? 에끼, 이 내숭아. 당신 대신 내가 그 분과 소줏잔을 나누고 왔으니 마음 놓으세요. 그럼, 내년에 또 만날 때까지 안녕.

(알림: 다음 주에는 여행 때문에 건너 뜁니다. 어디 가느냐구요? 쉿, 비밀!)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