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만드는 분명함과 모호함의 경계 - 영화 ‘헤어질 결심’
언어가 만드는 분명함과 모호함의 경계 - 영화 ‘헤어질 결심’
  • 문수인 작가(‘보리밭에 부는 바람’ 저자)
  • 승인 2022.09.16 10:21
  • 수정 2022-09-16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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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 관객의 친밀한 대화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 2022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죽은 남편이 산 노인 돌보는 일을 방해할 순 없습니다.”

귀에 콕 박혀 있던 문장의 패러디를 35년 후에 다른 곳에서 듣는 일은 ‘재미있다’.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대우받던 시대가 있었다.” 영화 <씨받이>의 나레이션이다.

일상에서 영화의 대사를 사용하는 순간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더 중요한 거지.”

영화 속 나레이션을 가져다 사용한 적이 있는데 그 쾌감이 상당했다. 육아와 가사 노동, 직업적 성취라는 몇 마리 토끼를 잡으며 분주하던 시절의 얘기다. 패러디하지 않아도 상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일으키기에 적절한 대사였다. 이십여 년 전 추석을 며칠 앞둔 날. 친구와 추석 차례상 얘기를 하던 중, 내 입에서 불쑥 나온 말이다. 당시 나이로 볼 때 지금의 박찬욱 감독과 비슷했을 노감독(임권택)의 시선과 함께 했던 순간이다.

말이 생각을 잘 표현하는가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는 안개로 표현되는 각종 모호함이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해준(박해일 분)의 주위에 상존한다. 그런데 해준과 주변 인물들이 사용하는 말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나 정확지 않은 발음이 이 모호함을 시각화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다. 해준이 수시로 안약을 사용하는 것은 정신(spirit)과 시각(sight)의 상관성을 보여준다. 서래의 어눌한 한국어 능력이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에 이것을 관객이 인지하긴 어렵지만 예민한 관객은 기억한다. 대사가 정확히 들리지 않아 짜증 났지만 내 귀가 안 좋은 것이려니 했다는 것을. 일상에서도 누구의 발음과 누구의 귀 중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찾아내는 건 쉽지 않다. 이것도 감독의 의도였으리라 생각하고 싶다.

중국인으로 성장한 서래(탕웨이 분)는 한국어 능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사전을 습관적으로 사용한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모국어가 일상 언어인 사람들은 부정확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사전을 들출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소통의 매개체인 언어가 상호 약속 하에 사용된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최후의 보루는 사전이다. 이 점에서 시종일관 정확성을 추구하는 인물인 서래와 다른 인물들의 대비가 관객에게 뒤늦은 통찰을 경험하게 한다. ‘붕괴’를 말하는 해준은 과연 서래로 인해 붕괴되었는가. 우리가 절망을 느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고 원망의 말을 하는지를 상기해보면 해준을 장악하고 있는 서래의 존재가 분명해진다. 서래의 영롱한 눈과 수시로 안약이 필요한 해준의 눈은 의식의 선명도와 행동 결정 능력이 다를 수 밖에 없다.

해준과 정안(이정현 분)의 관계에서도 이런 식의 불투명한 대화가 관객을 안개 속으로 이끈다. 옆자리 이주임(유태오 분)이 남자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야기하는 정안과 궁금한 것이 없는 해준. 주말에 온 남편을 놔둔 채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는 정안과 패딩 코트 안에 팬티만 입고 있는 해준에게서 근근이 이어가는 부부의 결혼생활이 보인다. 집요하게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것만큼이나 우리는 밀착해서 재미있게 살고 싶은데 말이다. 그래서 정안이 결혼생활에서 추구하는 게 대체 뭘까 하고 의아해하다가 관객은 결국 결혼과 사랑에 대해 각자 재인식하기에 이른다.

해준과 정안의 결혼에 대한 견해는 달라 보인다. 주말부부로서 해준이 늘 정안이 있는 이포로 가고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어하고, 생선을 사서 직접 손질(피를 무서워한다면서)하며 베드신에서 보여주는 부부관계는 편견을 깨는 것에 더해 불공평할 정도로 급진적 남편상이다. 과거에 자조적 ‘수퍼우먼’이 있었다면 해준은 이제 ‘수퍼맨’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욕망과 사랑의 시작

욕망과 사랑을 놓고 실체와 허상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거나 무엇이 먼저여서 점차 발전해간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면 편리할 것이다.

해준의 욕망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게 하는 원동력이다. 공감대가 형성되고 편안함을 느끼며 믿고 싶어지는 ‘우리’가 되게 하는 힘이다. 서래의 말이 유머(불면증인 형사와 노인 돌보는 일에 관한)로 발전해 해준을 통해 사용되면서 공유하는 장면은 서로 다가가고 받아들여지는 일상적 사랑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거침없이 욕망에 충실한 정안과는 달리 해준의 욕망에는 자신이 없고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108계단을 오르고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행위 정도로 성행위를 대신하고 눈 내리는 산을 쫓아 올라가면서도 죄를 추궁하는 것으로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전할 뿐. 해준의 감정이 기득권자의 두려움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허우적대는 상황에서 서래의 사랑은 갖지 못한 자의 두 손의 여백 혹은 자유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손가락의 결혼반지만큼이나 엄연한 현실이다.

타인의 심연을 보는 자

‘불편한 진실’을 볼 용기에 대해서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불편’하다. 그런 용기가 없는 사람이 주인공일 때 생기는 공감대와 리얼리티, 생각할 거리는 관객이 응당 누려야 할 권리다.

“이포에 왜 왔어요?” 공허한 질문은 상대의 귀로 들어가지 않는다. 진심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기 배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준의 물음이 공허한 반면 서래의 응수는 단호하며 간결해서 해준의 흔들림을 ‘꼿꼿하게’ 받친다. “그걸 왜 자꾸 물어요?” “나를 만났을 때 다시 사는 것 같았죠?” 질문조차 ‘꼿꼿한’ 서래는 해준의 심연을 보고 있으니 사랑의 확신에서 오는 자신의 것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서래가 조력사에 관여하는 것 또한 실존적 의미에서 두 노인의 심연에 닿은 결과로 보인다. 이런 능력은 인간애를 지닌 자에겐 축복이자 고통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겐 소명이고 누군가에겐 천형이라 해도 기꺼이 가야 하는 길이다. 죽은 새를 고이 묻어주듯 자신을 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자. 심연에서 희망의 씨앗을 집어 들고 일어서는 것은 물론 관객이어야 한다.

문제들을 경험 철학으로 정보 처리하고 재정비함으로써 반복되는 일상은 ‘평화’로 재인식될 수 있다. 앞으로 이 지면에 감독이 관객에게 대화를 유도하는 좋은 영화들이 등장해 일상을 다시 일으키는 도구가 됐으면 싶다. 

필자: 문수인 작가. 시집 ‘보리밭에 부는 바람’ 저자. 현재 SP 영화 인문학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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