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 ‘여권통문’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 ‘여권통문’

 

여권통문은 최초의 여성권리선언이다. 여학교설립을 위해 여성들의 지원을 호소하는 통지문으로 남녀동등권을 선언하고 권리실현을 위해서는 미래세대 여성들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런 여권통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여성계의 꾸준한 노력으로 여권통문이 발표된 9월 1일이 여권통문의 날로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20년부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여성인권과 성평등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개최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인 1898년 9월 8일 여권통문이 황성신문에 실렸다. 황성신문은 통문의 전문을 게재하면서 아주 짤막한 게재이유를 함께 실었다. ‘하도 놀랍고 신기하여’ 사설을 싣는 대신 통문을 게재한다는 친절한 설명이 그것이다. 삼종지도의 유교적 규범과 무권리의 일개 백성에 지나지 않았던 여성들이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공적 영역에 등장하였으니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흔들리는 경천동지할 일이었을 것이다.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 아니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혁명을 정치적 자유를 목표로 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행위는 폭력이 아닌 말과 실천으로서 ‘표현하고 토론하고 결단하는 활동’이다. 이런 아렌트의 시선에서 보면 여학교설치를 위한 여권통문의 발표는 혁명적인 행위였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마지막 부분에서 ‘시작은 끝이 줄 수 있는 약속이며 메시지이고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며 정치적으로 시작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한 것’이라며 전체주의의 종말의 끝에서 희망을 전한다. 시작은 억압과 지배, 낡은 것들과의 단절의 의미이며, 자유를 향해 현실의 조건과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인 것이다. 즉 여권통문은 가부장적인 사회규범과 구체제와의 단절을 시도한 이름 없는 소수의 여성들의 작고 조용한 혁명이었다.

A4 반쪽 정도의 짧은 분량밖에 되지 않는 통문의 발기인들은 ‘여성들의 개화 정치에 참여할 권리, 경제적 자립을 위한 직업을 가질 권리, 교육받을 권리’를 주장했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통문의 주장은 이미 법과 제도를 통해 실현되었고 더이상 놀랍지도 신기하지도 않을뿐더러 새롭지도 않게 되었다. 앞으로의 100년을 위한 새로운 여권통문이 필요할 정도로 세상은 많이 변했다. 물론 제도나 법이 아니라 실질적 차원에서 보면 여전히 여권통문의 혁명적 시작은 미완의 상태이다. 남녀평등의 권리는 법전의 권리로만 존재할 뿐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 불평등은 세상의 변화만큼이나 다차원적이고 교묘해졌다.

124주년의 여권통문의 날을 맞이한 2022년 오늘은 어느 때보다도 암울하다. 여성가족부 장관은 여성가족부의 폐지를 공언하고 대통령은 성평등은 실현되었고 구조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능력에 따른 개인적 차이일 뿐이라고 한다. 여당 국회의원의 전화 한 통화로 여성가족부 사업이 취소되고 여성과 성평등은 국회의원들의 기피단어가 되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국민의 절반을 버렸다. 여기에 청년 남성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과 왜곡은 상식의 선을 넘었다. 여성과 성평등, 페미니즘을 둘러싼 반지성과 이율배반, 자기부정이 난무하는 대혼란에 빠져있다.

2022년 오늘, 이 혼돈의 시기에 여권통문의 날을 기념하고 그 뜻을 새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조건으로 인해,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지는 차별과 불평등과 폭력은 불의이고 악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유인의 공정과 상식은 이러한 불의와 악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 모든 혼돈은 정치권이 단지 득표를 위해 성별 갈라치기를 미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취소하고 성평등국가비전을 제시하고, 정치권은 머리 숙여 사죄해야 한다. 그것은 앞선 정권이 잘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엄혹한 시절 이름 없는 소수의 여성들의 결단과 용기로부터 시작된 100년의 성과이기 때문이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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