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먼의 노래 속에 동아시아 여신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진 제공=김선자
샤먼의 노래 속에 동아시아 여신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진 제공=김선자

동아시아 지역에 전승되는 신화 속에서 여신은 매우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세상을 추위와 어둠으로 덮어버리려는 강력한 신 예루리와 싸우는 만주 지역 빛의 천신 압카허허(아부카허허)는 강한 힘을 가진 여신이다. 300여 명의 여신과 함께 거대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빛의 천신 압카허허는 만주 지역에 거주했던 여진의 여성 부족장 모습을 형상화한 신이다.

그런가 하면, 만주의 북부 헤이룽강 일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허저족의 신화에는 ‘코리’라는 이름의 여신들이 등장한다. 마을 공동체가 적들의 공격으로 파괴되면서 어린 남자아이 하나가 살아남는다. 부모님은 적들에게 잡혀가고, 사랑하는 누이도 사라진다. 남자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실의에 빠진다. 그러나 사라졌던 누이가 어디선가 다시 나타나고, 눈물을 흘리던 남자아이는 영적인 힘을 지닌 누이의 보살핌과 격려 속에 성장하여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는 영웅이 된다. 만주 지역 신화의 활 잘 쏘는 자, 즉 메르겐의 곁에는 언제나 누이가 있다. 적과 싸울 때 누이는 매의 형상을 한 코리로 변해 동생을 돕는다.

한편, 만주신화 속 최고의 샤먼은 ‘니싼’이라는 여성이다. 원래 만주족의 창세 서사시에서도 최초의 샤먼은 여성으로 그려진다.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어린 여자아이에게 매 여신이 젖을 먹여 키워 샤먼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영혼을 구하기 위해 저승 여행을 하는 니싼도 ‘대(大)샤먼’이다. 그러한 대샤먼 니싼의 모습은 우리의 제주도 신화, 즉 <차사본풀이>에 등장하는 ‘강림의 큰부인’에게도 나타난다.

염라대왕을 저승에서 데리고 온다는 점에서 영웅적 면모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차사본풀이>의 강림이 처음부터 영웅이었던 것은 아니다. 저승에 가서 염라를 데리고 오라는 원님의 명령을 받은 강림은 ‘결혼할 때 한 번 보고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큰부인’의 집으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운다. 많은 첩을 거느려 호방하다고 여겨져 발탁된 강림이지만, 염라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저승으로 가야 하는데, 그 길을 도무지 알 방도가 없었다. 난감해진 강림은 결국 큰부인을 찾아갔고, 큰부인은 강림에게 저승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니싼의 경우에서 보았듯, 저승으로 가는 길을 아는 자는 ‘대샤먼’이다. 그러니까 <차사본풀이>의 표면적 주인공은 강림인 것 같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강림의 큰부인이다. 지혜로운 큰부인이 있었기에 ‘울보영웅’ 강림은 영웅이 된다. 허저족 신화 속의 메르겐이 나아가야 할 바를 몰라 울고 있을 때, 그들의 길을 인도해주는 것은 누이들이다. 지혜를 지닌 이러한 여신들의 모습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영웅 서사에도 등장하고, 중국 여러 지역의 소수민족 신화에도 수시로 나타난다.(참고- 『제주신화 신화의 섬을 넘어서다』)

지금 우리가 여신들의 ‘지혜’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영웅들의 ‘힘’보다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다. 강력한 남성적 힘을 바탕으로 단선적으로 진화해온 물질문명은 이제 우리에게 뒤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뒤돌아본 그곳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신화 속 여신들의 지혜이다. 미성숙한 영웅들을 제대로 된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여신의 ‘지혜’가 남성 영웅의 ‘힘’과 합쳐질 때, 망가지고 파괴된 마을 공동체가 비로소 원래 모습을 되찾게 된다는 것,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지점이다.

*[신화와 역사 속 여성 리더십] 칼럼은 전라남도 양성평등기금의 지원을 받은 (사)가배울 살림인문학 아카데미  강연의 요약본입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