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미군 ‘위안부’ VR영화 3부작 김진아 감독
‘동두천’·‘소요산’으로 국내외서 호평
마지막 3부작 내년 공개
“구체적인 폭력 묘사 없이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
여성인권 착취하지 않는 창작 고민...
‘나를 찍는다’ 생각하면 분명해지더라”

‘동두천’(2017), ‘소요산’(2021) 등 미군 ‘위안부’ VR 영화 3부작을 만든 김진아 감독.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동두천’(2017), ‘소요산’(2021) 등 미군 ‘위안부’ VR 영화 3부작을 만든 김진아 감독.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미군 ‘위안부’의 역사는 국가가 주도한 여성 인권 잔혹사다. 1960년대부터 조성된 주한미군 기지촌에서 여성들은 미군의 폭력 앞에 무방비하게 던져졌다. 국가는 여성들을 보호하긴커녕 ‘달러 벌어들이는 애국자’라며 부추기고 적극적으로 관리했다. 

김진아 감독은 이 이야기가 묻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VR 영화를 만들었다. 1992년 주한미군의 여성살해 사건을 다룬 ‘동두천’(2017), 성병 검진에서 탈락한 여성들이 끌려간 강제수용소를 다룬 ‘소요산’(2021)이다. 2017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베스트 VR 스토리상(동두천), 2021년 제네바영화제 가상현실 최우수작품상(소요산)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특별전에서 ‘증강현실(AR) 소요산’, ‘확장현실(XR) 소요산’도 처음으로 선보였다. 관객들은 VR 헤드셋을 쓰고 영화를 볼 수도 있고, 실제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 복도 크기의 레드카펫 위를 걸으며 3D 모델링된 수용소를 체험할 수도 있다. 영화제 개막 전부터 전석 매진될 정도로 화제다.

김진아 감독을 24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만났다. 그가 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방식, 폭력을 어떻게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들어봤다.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VR 영화 3부작 중 ‘소요산’ 스틸컷. ⓒ제24회 서울국제영화제 제공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VR 영화 3부작 중 ‘소요산’ 스틸컷. ⓒ제24회 서울국제영화제 제공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VR 영화 3부작 중 ‘동두천’ 스틸컷. ⓒ제24회 서울국제영화제 제공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VR 영화 3부작 중 ‘동두천’ 스틸컷. ⓒ제24회 서울국제영화제 제공

‘동두천’, ‘소요산’은 각 12분 분량의 짧고 강력한 영화다. ‘동두천’은 관객을 경기도 동두천 미군기지 주변 유흥가로 데려간다. 여인을 따라 들어간 좁고 어두운 방에서 관객은 1992년 케네스 마클 미 육군 이병이 윤금이 씨를 살해하는 순간을 체험한다. ‘소요산’은 1960년대 초 설립된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 인근 ‘몽키하우스(낙검자 수용소)’로 관객을 데려간다. 한국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성병 검사를 강요하고, 탈락하거나 거부하면 이곳에 감금하고 학대했다. 여성들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노골적인 폭력이나 착취의 묘사는 어디에도 없다. 영화는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담지 않는다. 잔인한 역사의 흔적이 남은 공간에 주목한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간간히 들리는 여성들의 한숨 소리, 울음소리에 가슴이 조여왔다.

김진아 감독은 ‘고통의 포르노적 재현은 불가하다’는 원칙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간다. 폭력 피해 당사자를 착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 그의 오랜 숙제다. 1992년 케네스 마클의 윤금이씨 살해사건이 계기였다. 참혹한 시신 사진이 언론과 시민단체 전단지에 고스란히 실렸다.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김진아 감독은 충격을 받았다. 적나라한 이미지로 민족의 공분을 사는 데 성공했을지는 모르나, 피해자를 착취하는 일이었다.

“폭력을 재현하는 일은 제작진에게도 관객에게도 폭력이 될 수 있어요. 그렇다면 폭력의 본질을 엑기스처럼 뽑아내어 시적으로,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어요. ‘동두천’, ‘소요산’이 그런 영화죠. 구체적인 폭력의 장면은 하나도 없지만 관객들은 무언가를 강렬하게 느낍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윤금이씨 살해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업 영화 제작도 추진했다. 그러나 ‘사건을 보여주지 않고 어떻게 하냐’, ‘주인공은 가해자를 쫓는 남성 형사여야 하지 않겠냐, 죽은 여성들이 주인공이라면 우울한 드라마가 될 텐데 그걸 누가 보겠냐’ 등 주변의 냉담한 반응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진아 감독은 “저는 활동가가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예술가”라며 “그러나 상업 영화를 만들면서 역사 속 폭력을 무분별하게 재현하거나 아시아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해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저는 후기 식민지 사회에서, 게다가 한국전쟁을 겪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자란 아시아 여성이에요. 그런 작업을 할 수 없어요. 늘 딜레마에 부딪히지만 그래도 여성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 이미지를 착취하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마지노선’이 있을까. “피사체가 제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기준이 분명해져요. 내가 젠더폭력을 겪은 당사자라면 이러한 재현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창작자마다 각자의 방식이 있고 고통을 재현하는 게 정당화되는 경우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내가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보여주지 않아요.”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버려지고 훼손된, “눈앞에서 소멸되는 공간들”을 다루는 작업이다. 미 UCLA 대학교 영화과 종신교수인 김 감독은 한국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관련 자료도 다수 찾아봤다. 심리적·신체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참혹한 내용이 많았다. 제작진들도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 다른 기지촌을 주제로 한 마지막 3편 촬영이 곧 시작된다. 내년 봄 공개 예정이다.

정부는 아직도 미군 ‘위안부’ 규모와 인권침해 실태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기지촌 여성’은 ‘국가폭력의 희생자’라는 인식과 함께 이들의 명예 회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심, 2심은 여성들의 손을 들어줬다. 생존자들이 70대~80대가 되도록 최종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다. ‘양공주’, ‘양갈보’라며 손가락질하거나 외면하는 이들도 많다.

“미군 ‘위안부’ 문제가 잘 알려지지 않고 해결도 더딘 것은 이들이 익숙한 개념과 가치관을 교란하는 ‘불편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봐요. ‘순결한 한국인 피해자-적국의 가해자’라는 익숙한 이분법에도 들어맞지 않죠. 다양성, 인권에 대한 성숙한 이해 없이는 우리 사회가 이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한국 사회를 바꿀 주역은 젊은 여성들이라면서 “기대가 크다”고 했다. “제 작품이 반향을 얻는 이유도 포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진 젊은 여성들 덕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세대만 해도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않은데 20대들은 달라요. ‘미투’ 운동 때부터 젊은 여성들이 부당한 상황을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걸 보며 감탄했어요. 이들이 기성세대가 되면 한국은 굉장히 달라질 거라고 믿어요.”

김진아 감독은 자신의 영화 여정을 “재현의 관습(convention)에 대한 반발”, “여성은 유방을 가진 어머니 아니면 성기를 가진 창녀라는 가부장적 이분법을 깨려는 시도”라고 표현했다. 유학 생활 6년간 거식증을 포함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 임신한 후 강렬한 성욕을 경험하는 여성의 이야기 등을 파격적으로 묘사한 ‘그 집 앞’, 임신이 잘 되지 않자 한국에서 온 불법체류자 지하(하정우)와 몰래 잠자리를 갖는 중년 여성 소피(베라 파미가)가 주인공인 ‘두번째 사랑’ 등이 그랬다.

남성중심적 세계에서 분투하는 여성 예술인과의 공감도 이야기했다. 여성 최초로 미국 대형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에 오른 마린 알솝 볼티모어 심포니 음악감독이다. 그의 여정을 담은 다큐 ‘지휘자’(The Conductor, 감독 베르나데트 베겐슈타인, 2021)를 강력 추천했다. “편견과 차별을 딛고 최초의 여성지휘자가 되어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한 여성에게 인종과 국가를 넘어 존경을 느꼈다”라며 관람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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