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담론, 남성 중심적인 역사 인식을 탈피해 여성의 기억과 언어로 역사를 구성한 책들이 나와 화제다.

한 권은 여성의 기억을 토대로 개개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복수'의 역사로 재구성한 구술집이고,

다른 한 권은 백인 사회의 소수민족, 아시아의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문학으로 풀어낸 창작집이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연구팀이 펴낸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일본군 '위안부', 민족담론에서 여성역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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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부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연구팀이 펴낸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여성과인권)는 공식 역사에서 배제된 여성의 경험을 '이야기'를 통해 역사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사실의 정확성이 요구되는 증언은 사료의 공백을 메우는 데에 유효한 방법일 수는 있으나 구술자가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생애에 대해 평가하고 해석하는 구술의 주체성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김명혜 전남대 인류학과 교수와 강현주, 김동희, 김은경, 박정애, 오연주, 최기자 등 학생, 단체활동가 11명은 2002년부터 머리를 맞대고 기존의 운동, 학계에서 나타난 '위안부' 여성연구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성찰했다.

책에서 지적하듯 우리 사회가 기억하는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는 '강제로 끌려간' 기억, 동원과정의 강제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책에서는 “동원과정만을 부각시켜 일본군 '위안부'의 전형을 만들어낸 기존의 '위안부' 개념에서 벗어나 실제 위안소의 성폭력 경험과 그 당사자의 기억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개념이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에는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섭섭해하면서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타박하는 여성, '위안부' 등록증을 액자에 끼워 거실 벽에 걸어놓고 자랑스러워하는 여성, 가족이 없는 경우에만 인터뷰를 허락하는 여성 등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과 구술이 혼재한다. 또한 소제목과 표제를 넣어 읽는 이로 하여금 구술의 맥을 놓치지 않도록 배려했고, 증언 4집에서 사용됐던 따옴표를 넣어 “구술자가 읽는 이를 향해 말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구술자와 면접자의 관계, 구술을 하고 있는 상황과 조건이 어우러져 완성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참여기를, “우리 사회에서 인터뷰나 출판을 거부하게 되는 과정과 맥락도 또 다른 형태의 증언”이라는 판단에서 실패기를 함께 실었다.

이번 구술집이 6집에 해당하는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은 1993년 1집 이후 11년 동안 꾸준히 이어져 왔다. 4집부터는 사회학, 여성학 연구자들이 기존 구술집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구술자의 주체성에 초점을 맞춰 작업에 동참해 왔다.

연구에 참여한 김은경씨(숙명여대 한국사 박사과정)는 “위안부 문제는 한국 남성들이 여성의 성문제를 대하는 방식을 문제삼아야 하기 때문에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배상을 요구하는 담론뿐 아니라 여성주의 시각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본 담론 등 담론의 장이 다양하게 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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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정대협 부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연구팀원들(왼쪽 뒷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동희, 최기자, 김은경, 오연주, 강현주씨).

차학경의 <딕테>-어머니의 언어와 글을 받아쓰다

그의 언어는 '실험적'이다. 그의 경험 자체가 '탈식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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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선보여 온 차학경의 창작집 <딕테>가 어문각에서 재출간됐다. 시와 산문이 혼합돼 남성문화에 대한 도발적인 언어 실험을 행하고 있는 <딕테>는 행간에 놓인 저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선 참다운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책의 제목인 딕테는 '받아쓰기'란 뜻의 불어로 학교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동적 받아쓰기와 여성의 꿈과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능동적인 받아쓰기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저자에 따르면, 전자가 상징계 속 아버지의 언어와 글에 대한 받아쓰기라면, 후자는 상상계 속 어머니, 여성의 언어와 글에 대한 받아쓰기다.

<딕테>는 모두 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신(詩神)들과 그들이 주관하는 학문이 나오고 실제 역사 속 여성(유관순, 저자의 어머니 허형순, 성 테레사)들의 사진 혹은 그림이 함께 배치된다.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모국어 사용을 금지당했던 어머니의 경험은 '칼리오페 서사시'를 통해 미국 사회의 이방인이자 여성인 저자 자신의 경험과 대비되어 소개되며 '클리오 역사'의 장에선 유관순의 사진과 그에 대한 글, 의병의 활동이 묘사된다. '멜포메네 비극'에선 휴전선이 그려진 한국 지도를 앞에 두고 어린 시절의 4·19의 경험과 분단에 대한 단상을 적었다. '우라니아 천문학'은 인체를 천문에 비유해 말하고 싶은 욕망, 쓰고 싶은 욕망을 시로 표현하기도 한다.

불어와 영어가 병행된 차학경의 글은 '영화의 극본 같은 현재형 묘사' '시제가 부정한 원형동사'등이 주로 사용돼 난해하고도 실험적이란 평을 듣는다. 일찍이 차학경은 <예술가의 말>에서 “내 작품의 주요 부분은 그것이 혀 끝에서 태어나기 전에 언어의 뿌리를 찾고 있는 언어와 관계되는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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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나이에 좀더 의식적으로 외국어들을 배우도록 강제되면서 언어를 향한 다른 지각과 적응이 생겼다. 나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끌어 온 것은 언어의 문법적 구조들, 통사론들이었다. 그리고 통사법을 바꾼다든지 컨텍스트를 없애 고립시킨다든지 반복이나 최소 단위로 축소시킨다든지 하는 여러 조작을 통해 어떻게 변형을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쓰여진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합치기, 책이 물질적으로 가진 속성들(페이지 순서나 침묵, 쉼들, 시간 또는 공간)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1951년 부산에서 출생, 1964년 가족들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코로 이주한 차학경은 <딕테>가 출간한 지 3일째 되는 날 31세로 살해당했다. <딕테>는 일본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1998년 국내 연극집단 뮈토스(대표 오경숙)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됐다. 2000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세계여성연극대회에도 출품됐다.

임인숙 기자isim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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