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저자
한국성폭력상담소 3년간 상근활동
지금은 7년째 동물병원 의사로

병원에서 동물을 치료 중인 허은주 수의사. (사진=본인 제공)
병원에서 동물을 치료 중인 허은주 수의사. (사진=본인 제공)

약 3년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상근활동 했던 페미니스트 ‘키라’는 이제 동물을 치료한다. 수의사가 돼 동물병원을 개업한 지 7년째. 사람과 말하기 싫다는 어떤 피로감에서 시작된 직업이지만, 동물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탓에 오히려 사람의 말을 더 많이 듣게 됐다. 하지만 마음의 빗장을 예전보다는 더 느슨하게 풀어뒀다는 그. 풀어둔 빗장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담은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를 낸 허은주 수의사를 만났다.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라는 예쁜 제목에 나온 ‘꽃비’는 첫 장에 나오는, 보호자가 죽고 홀로 남은 강아지의 이름이다. 이 강아지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병원에서는 강아지의 죽음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지만 꽃비는 반대였어요. 꽃비는 엄마를 기다리면서도 일상을 씩씩하게 잘 살아냈습니다. 마치 제일 사랑하는 엄마가 꽃비가 불행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꽃비가 다 아는 것처럼요. ‘인간이 비인간 동물과 서로 사랑하고 마음을 나눈다는 게 뭘까’, ‘상대의 죽음 이후의 남겨진 존재는 어떤 일상을 살아가게 될까’에 대해 오래 고민하도록 여운을 준 아이였습니다.”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허은주/수오서재/1만 4800원) ⓒ수오서재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허은주 지음, 수오서재 펴냄). ⓒ수오서재

허은주 수의사의 말처럼 병원에서는 동물을 떠나보내는 일이 많다.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에서 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2장에 등장하는 닭 ‘구구’부터, 마지막 장에 나오는 죽은 새까지. 동물의 죽음을 수없이 마주하는 일이 어렵진 않을까. 그에게 슬픔을 회복해나가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슬프면 그냥 슬퍼하려고 그 감정에 잠기게 두는 편입니다.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고,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는 아이였는지에 대해서 병원 식구들과 펑펑 울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나면, 아이를 보내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에서요.”

소싸움 반대 1인 시위 중인 허은주 수의사.(사진=본인 제공)
소싸움 반대 1인 시위 중인 허은주 수의사.(사진=본인 제공)

이런 그가 노력을 쏟고 있는 일이 있다. 바로 소싸움 반대 운동이다. 쉬는 날 우연히 반려견과 근처 산책로에 다녀오다가 떠 있는 ‘전국 소싸움대회’라는 문구가 쓰인 애드벌룬을 보고 향한 곳에서 만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주차장에 있는 트럭에 서 있는 소와 마주쳤습니다. 크고 둥근 순한 눈을 봤고, 짧은 줄에 코뚜레가 꿰어 트럭에 매여 있었어요. 가까이 가니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느껴졌어요, 소는 얼굴을 움직여 코를 제 손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습니다. 이런 소를 억지 싸움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 이후에는 병원 스케줄을 조정하면서 최대한 일인시위를 비롯한 활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게 됐습니다.”

7년째 수의사로 살아가면서, 소싸움 반대 운동을 활발히 하는 그에게는 페미니즘을 기치로 활발히 활동했던 과거가 있다. 활동명은 ‘키라’.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팀과 성문화운동팀에서 팀원으로 약 3년간 일했다. 2021년에는 영페미(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페미니스트)들이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찾아가 보는 영화 ‘우리는 매일매일’에 출연하기도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했던 당시의 모습.(사진=본인 제공)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했던 당시의 모습. 가장 왼쪽이 허은주 수의사.(사진=본인 제공)

“영화 공개 이후에는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이 생겨서 신기했습니다. 치료를 받기 위해 멀리서 저희 병원으로 반려동물을 데려오시는 분도 계셨죠. 제 자신의 페미니스트 정체성이 환기되면서 힘을 받기도 했습니다. 과거 자신의 생각과 활동을 긍정하는 것이 현재의 나에게 큰 힘을 준다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허은주 수의사는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를 출간하고 소싸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한편 동물들의 진료에 전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우리는 매일매일’ 상영 이후 페미니스트 키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페미니스트 키라는 동물병원 수의사로 겪게 되는 모든 일들에서 페미니스트의 질문을 갖고 살아갈 겁니다. 실제로 저에게는 이것이 큰 힘이 됩니다. 비록 지금은 페미니스트 활동을 하던 동료들과 몸은 떨어져 있지만, 질문하는 과정 자체는 제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늘 환기해주기도 하고요. 페미니스트 인식론을 장착하는 것은 사실 불가역적인 과정이죠. 건널 수 없는 강이지만, 그것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반려조 사랑이와 함께 있는 허은주 수의사의 모습.(사진=본인 제공)
반려조 사랑이와 함께 있는 허은주 수의사의 모습.(사진=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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