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재출간 『파친코』 이민진 작가
한국 이야기 꾸준히 써온 한국계 미국인
대학생 때 접한 가슴아픈 재일조선인 사연
취재 거쳐 30년만에 대하소설로...세계적 주목받아
‘국내 절판 사태’ 후 최근 새 번역판 출간

“자기 뿌리에 관심 많은 젊은 세대
빈 깡통 되지 않게 역사적 면 채워주고파
글쓰기는 저항이고 혁명...
사람 간 연결성 찾아 더 나은 세상에 기여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 정당한 평가 필요”
차기작은 한국 교육열 다룬 『아메리칸 학원』

이민진 작가가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파친코』의 국내 재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인플루엔셜 제공
이민진 작가가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파친코』의 국내 재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인플루엔셜 

열세 살 재일조선인(자이니치) 소년이 있었다. 일본인 동급생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겪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 너한테 김치 냄새가 나, 죽어, 죽어!”

한국계 미국인인 이민진(54) 작가는 1989년 예일대 역사학과 대학생 시절 특강에서 들은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슬프고 화 나는 이야기가 세계적 베스트셀러 『파친코』의 씨앗이 됐다.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대하소설이다. 시대의 비극을 어떻게든 감내해야 했던 이민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기리는 책이다. “젊은 한국계 미국인 독자들이 이제 우리 엄마를 이해하게 됐다, 아빠와 대화할 수 있게 됐다고 하더군요. ‘한국인이라서 자랑스럽다’는 독자 편지도 받았어요.”

이 작가는 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뿌리’를 강조했다. “젊은 세대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심이 많아요.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역사가 빠지면 무의미하죠. 빈 깡통이 되지 않도록 역사적인 면을 채워주고 싶었습니다. 다만 역사를 승자와 패자의 이야기처럼만 나열하면 재미가 없죠. 역사 속 개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가는 “한국인은 지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깊이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가치가 있는 이들”이라고 강조한다. “요즘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이야기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류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시작된 뛰어난 예술과 문학, 한국 정부의 수출 노력 등이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생각해요.”

한국을 잘 모르는 독자도 ‘한국인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자신의 소설을 읽기를 바란다. 독자들을 만나면 “나는 당신을 한국인으로 만들려 한다”고 말한다면서, “저도 톨스토이를 읽을 땐 러시아인이 되고, 찰스 디킨스를 읽을 땐 영국인이 된다”고 덧붙였다.

2022년 7월 말 출간된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개정 번역판(인플루엔셜) ⓒ인플루엔셜
2022년 7월 말 출간된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개정 번역판(인플루엔셜) ⓒ인플루엔셜

한국에서 『파친코』는 2018년 번역본이 출간됐고 올해 초 애플TV+ 드라마화로 주목받았다. 판권 계약 문제로 절판 사태를 겪다가, 약 3개월 만인 7월 말 인플루엔셜 출판사에서 새 번역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이 작가는 개정판에 부쳐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적확한 번역, 오디오북·e북 출간 등 시대 변화에 맞는 유통 방식이 만족스럽다고 밝혔다. 

또 “글쓰기란 위험한 행위다. 반항이고, 혁명(Writing is a dangerous act. Act of defiance, act of revolution)”이라며 “『파친코』도 위험한 책이다. 출판사가 그런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길 바랐고 그런 곳을 찾았다”고 했다.

작가를 꿈꾼 적은 없었다. 아이비리그를 나와 변호사로 일하다가 간질환을 앓으면서 중단했다. 오랜 꿈이었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소설을 쓸 땐 기자 수준으로 자료 조사·취재에 공을 들인다. 『파친코』 집필에만 30년이 걸렸다.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과 함께 4년간 일본에 머물며 재일조선인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조사를 벌였다. 

차기작은 『아메리칸 학원』이다. 한국인 공동체 어디에나 존재하는 학원 시스템을 통해 한국의 교육열과 그 맥락, 교육의 역할 등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담을 예정이다. 데뷔작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올해 겨울 국내 출간 예정), 『파친코』에 이은 ‘한국인 디아스포라 3부작’ 마지막 소설이다.

그는 문학을 통해 평화와 공존을 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팬 사인회 때면 ‘우리는 가족’이라는 문구를 쓰기도 한다. 『파친코』 개정판에도 “우리는 강한 가족이다(We are a powerful family)”라는 친필 사인을 수록했다. “세상이 더 나아지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걸 아는 일입니다. 내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를 고민하자는 거죠. 연결성을 보자는 겁니다.” 전 세계의 한국인들이 “충분한 인정(recognition)과 사랑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았다.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 더 목소리를 내고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소설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며 “이제는 저를 포함한 아시아계 미국인,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 점점 주목받고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 더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민진 작가가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파친코』의 국내 재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인플루엔셜 제공
이민진 작가가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파친코』의 국내 재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인플루엔셜  

이민진 작가는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변호사로 일하다가 건강 문제로 그만두고 작가가 됐다. 2004년부터 단편소설들을 발표했고, 2008년 미국 이민자의 이야기를 담은 첫 장편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이 ‘뉴욕타임스 편집자들이 꼽은 책’ 등에 선정되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두 번째 장편소설 『파친코』는 2017년 2월 미국에서 처음 출간돼 전 세계 33개국에 번역 수출됐다. 75개 이상 주요 매체가 꼽은 ‘올해의 책’,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 추천도서에도 올랐다. 한국에선 2018년 3월 번역본이 출간됐고 올해 초 애플TV+ 드라마화로 주목받았다.

『파친코』 새 번역판, 어떻게 달라졌나

인플루엔셜 출판사는 “첫 문장부터 원문의 의미를 보다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고 밝혔다. 신승미 번역가가 번역을 맡아 간결하고 쉬운 문장이 탄생했다. 작품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체를 살리고, 작가가 의도한 구조와 흐름을 살리기 위해 총 세 파트(1부 ‘고향’, 2부 ‘모국’, 3부 ‘파친코’)로 원서 구성을 그대로 적용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개정판)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구판)

“1911년 봄, 훈이가 스물여덟 살이 되었을 때 볼이 불그레한 중매쟁이가 훈이 어머니를 찾아왔다.”(개정판)
“1911년 봄, 훈이가 스물여덟 살이 된 지 2주가 지났을 때였다. 뺨이 불그스레한 중매쟁이가 훈이 엄마를 찾아왔다.”(구판)

분량도 다르다. 구판은 1권에 2부 9장까지, 새 번역본은 2부 10장까지 수록했다. 표지도 바뀌었다. 구판은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하드커버 표지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새 번역본은 파친코 기계를 꽃과 나비로 구현해 디자인한 표지를 썼다. 『파친코』 오디오북도 나왔다. 1권은 10일부터 윌라 오디오북에서 매주 월수금 10회에 걸쳐 공개될 예정이다. 2권은 오는 9월 7일부터 1권과 동일한 형태로 연재 예정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