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이 들춘 어리석고 평범한 남성성
‘헤어질 결심’이 들춘 어리석고 평범한 남성성
  • 유해 작가
  • 승인 2022.08.07 10:03
  • 수정 2022-08-08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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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헤어질 결심’의
꼿꼿함과 믿음직함 이면을 들여다보다
과잉된 자아, 불륜 자기합리화...
뭔가 다른 줄 알았던 그 남자
들춰보니 그저 그런 남자였네

이방인·돌봄노동자·가정폭력 피해자
‘한국사회 최약체’ 여자 주인공
살고 싶어서 살인·거짓말 저지르고
‘해치지 않는 남자’ 사랑하게 되고
연인 지키기 위해 ‘헤어질 결심’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CJ ENM 제공

‘헤어질 결심’의 아름다운 멜로적 정취가 가라앉은 후 가장 많이 곱씹은 것은 절절한 사랑이 시작된 이유다. 영화의 말미, 두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한 호미산을 떠올려본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서래 때문에 잔뜩 약이 올랐던 해준은 “내가 왜 서래 씨를 좋아하는지” 아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긴장하지 않고도 그렇게 꼿꼿한 사람은 드물어요. 난 그게 서래 씨에 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울분에 찬 자문자답이 지나간 자리에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서래는 어째서 그렇게 꼿꼿한 사람일 수 있었을까. 어쩌면 서래는 ‘긴장하지 않고도 그렇게 꼿꼿한’ 사람이 아니라, 연인 앞에서조차 ‘긴장을 놓지 못해 꼿꼿한’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배우 탕웨이가 직접 덧붙였다시피 서래는 생존만을 모색하느라 사랑할 여유도 없었던 인물이다. 재중 교포 3세대(경계인), 밀항해 입국한 외국인(디아스포라), 젊은 여성, 매 맞는 아내(가정폭력 피해자), 간병인(돌봄 노동 종사자)이라는 약자적 지위의 중첩. 한국 사회의 최약체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첫 남편을 죽였고 사람으로 살기 위해 연인을 성실히 속였다.

그렇다면 서래가 ‘긴장하지 않고도 그렇게 꼿꼿한 사람’이라서 최초의 애정 어린 호기심을 품었다던 해준의 말은 서래의 존재론적 위기에 대한 아주 거한 오해라고밖에 할 수 없어진다. 당연한 일이다. 형사로서 범죄의 면면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남다를 뿐, 해준을 이루는 속성 중 그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없다. 그의 국적도 성별도 계급도 그를 해칠 수 없다. 해준은 서래의 “참, 불쌍한 여자네.”라는 말을 즉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서래와는 완전히 반대편에서, 즉 ‘보편’에 서서, 서래의 긴장한 등과 어깨를 보고 오로지 품위에서 비롯된 꼿꼿함만을 읽어낸 해준의 사랑은 처음부터 자기 본위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래는 왜 이토록 다른 높이에 서 있는 해준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호미산에서 서래는 가족들의 유골을 대신 뿌려주는 해준을 “믿음직한 남자”라고 표현한다. 앞서 해준이 잠복하며 서래를 감시할 때도 서래는 ‘믿음직한 남자가 잠도 안 자고 날 지켜주는 것 같아서’ 좋아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다. 집안을 훤히 들여다보는 형사를 향해 용의자가 품은 것치고는 일반적이지 않은 마음이다. 서래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즉 안전의 보증이었다는 슬픈 사실이 다시 한번 뚜렷해진 순간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CJ ENM 제공

그러나 해준의 부인 정안의 관점에서도 해준이 ‘믿음직한 남자’이기만 한가. 해준은 아름답고 현명한 여자와 가정을 이루고도 살인사건 없이는 결핍을 느끼는 희한한 가장이다. 그는 관계 중에도 사건 생각에 정신이 팔릴 정도로 성의 없는 남자기도 하고, 정안이 수시로 확인받고 싶어 하는 애정에 늘 어긋난 대답을 내놓는 (해준: “그러니까 사람들이 우릴 싫어하지.” / 정안: (반색하며) “우리?” / 해준: “경찰”.) 얄미운 남자기도 하다.

그런 해준이 정안보다 훨씬 어리고, 약하고, 공격받기 쉬운 위치에 처한 다른 여자에게 “서래 씨가 나랑 같은 종족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았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설렘 대신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겨우 ‘말씀 대신 사진’으로 남편의 죽음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는 이유만으로 ‘종족’이라는 강력한 경계 짓기의 단어를 쓰다니. 해준이 (자신도 모르게) 의도한 효과는 ‘당신과 나는 닮았다’는 귀여운 동질감을 나누는 수준이 아니라, ‘내 아내를 포함한 타인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고, 오로지 당신과 나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완전한 일체감을 서래와 자기 자신에게 못 박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때 나와 ‘같은 종족’인 줄 알고 결혼했으나, 이제는 보답할 수 없는 애정을 제멋대로 부어주거나 사소한 기호까지 통제하려 드는 똑똑하고 기세 좋은 부인보다 당신의 연약하고 흐릿한 품위가 좋다, 당신이 새로이 찾은 나의 ‘같은 종족’인 것 같다 - 는 함의가 담긴 그 말에서 나는 너무나 익숙한 종류의 두 가지 무의식을 감지한다. ① 폭력이 자주 수반되는 직업군에 몸담은 남자 특유의 과잉된 자아, ② 어린 여자와 외도하는 늙은 남자들의 자기합리화. (그래서 불현듯 해준을 비웃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다면, 당신도 나와 같은 종족이다.)

해준의 얕은 그릇, ‘남자다운’ 바닥은 그 후에도 자꾸만 드러나 비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한다. 서래에게 입술을 붙잡히고도 꿋꿋이 내뱉은 “나는요, …깨끗해요.” 그 말을 기어이 끝내버려서 해준은 역시 깔끔한 성격이라고 평해진 다른 남자와의 공통점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바로 서래의 첫 남편 기도수다.

남편들끼리 무의식중 공유되는 신체 언어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포에서 재회했을 때 서래의 남편 임호신은 해준을 보며 손을 꺾어 위협적인 뚜둑 소리를 낸다. 이 유치한 ‘남성적’ 제스처는 해준을 떠나는 정안을 데리러 온 동료 남성 이주임이 등장했을 때 배신감을 느낀 해준에 의해 재연된다.

이렇게 해준은 ‘다른 남자들과는 뭔가 다른’ 남자처럼 등장했다가, 멀끔한 포장이 한 겹씩 벗겨지며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 없는 면모를 들키고, 결국 제 발밑의 진실조차 찾지 못하는 답답한 남자로 완성된다. 박찬욱 감독의 솜씨대로 아주 부드럽고 변태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해준의 실체는 바로, ‘아무것도 아닌 남자’.

품위 있는 현대인이자 긍지 높은 형사이자 믿음직한 남자로 보였던 해준의 실체가 분명해질수록 서래의 사랑은 더 위대해진다.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어리석고 평범한 인간을 그토록 열심히 사랑했기 때문에 서래라는 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래는 그 너그러운 사랑이 연인을 무너트리지 않도록 자멸해야만 하는 계급의 여자기도 하다. 정안의 산뜻하고 단호한 ‘헤어질 결심’과 서래의 비참하고 반역적인 ‘헤어질 결심’. 같은 남자와 헤어지는 두 여자의 사뭇 다른 선택을 슬프고 아린 마음으로 되짚어보게 되는 이유다.

 

유해 작가는

회사원. 영화 읽고 책 보고 글 쓰는 비건 페미니스트. 브런치: https://brunch.co.kr/@yoohae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미스터리·로맨스 영화. 산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가 사망자의 아내와 만난 후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며 시작되는 이야기. 박 감독·정서경 작가 공동 각본, 박해일·탕웨이 주연. 제75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기고 관련 의견이나 문의는 saltnpepa@womennews.co.kr 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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