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을 걸어다니는 '뚜벅이'족인 까닭에 지하철을 이용할 때가 아주 많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여덟 개인가 아홉 개인가 되는 호선들은 헛갈리기 일쑤인데다가 나가는 방향, 갈아타는 방향, 들어가는 방향들도 중구난방이어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놓치지 말아야 낭패를 면할 수 있는 것 빼고는 지하철에 별 유감은 없다.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 놈의 에스컬레이터 때문이다. 평소에도 우리나라는 아주 이상한 쪽에서 공중도덕을 부르짖고 가르치고 계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지하철을 타러 갈 때마다 에스컬레이터 때문에 아주 울화통이 터진다.

에스컬레이터 입구에는 “바쁜 손님들을 위하여”인가 “걸어가는 사람을 위하여”인가의 문구 뒤에 “왼쪽은 비워둡시다” 라고 써 있는 입간판이 떡 하니 서 있다. 어쩌다 그냥 에스컬레이터가 그리 붐비지 않아 왼쪽에 서 있을라치면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흘낏거리고 뒷사람도 덩달아 눈치를 준다. 그럼 오른쪽에 서 있거나 빨리빨리 걸어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론 그럴 순 있다. 그러나 왜 꼭 그래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완전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앞사람 목덜미에 내 코가 닿을 만큼 오른쪽에 얌전히 서 있어도 왼쪽으로 부랴부랴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이 가방을 툭툭 치지 않나, 어깨를 건드리고 가질 않나…. 그것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그럼 처음부터 생각해 보자. 아주 바쁘거나 다리가 튼튼한 사람을 위해선 에스컬레이터말고도 바로 옆에 계단이 있다. 에스컬레이터의 원래 목적이 서 있기만 하면 저 위까지 데려다 올려주는 기계 아닌가. 존재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닌가. 왼쪽은 모두 비워놓고 모두가 공중도덕을 지키는 선량한 시민처럼 모두 딱 한 줄로 오른쪽에만 얌전히 서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는 모양새를 볼 때면 난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이상한 쪽으로만 예의가 바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또 하나. 경로석 이야기다. 경로석 앞에는 “이 자리가 그렇게 탐나십니까?”라는, 사뭇 협박조의, 비아냥조의 문구가 붙어 있다. 그래, 난 탐난다! 아직 경로우대증을 받을 나이는 아니지만, 애를 둘이나 낳고 하루 종일 걸어다니며 일하다가 지쳐 지하철을 타면 앉을 자리가 너무 간절하고 탐나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경로석이라도 텅 비어 있으면 좀 앉아 있다가 정말로 나보다 나이 들고 불편한 누군가가 오면 양보해 주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거기 잠시 앉는다고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다거나, 철면피한 인간은 아닌데도 예의범절이나 공중도덕을 지킬 줄 모르는 인간으로 간주되는 현실이 좀 서글프고 싫다.

강요된 공중도덕, 협박하는 예의범절에 화가 나고 무섭다. 무지몽매한 인간을 훈계하듯 박힌 그 글자들이 싫다. 근데, 모두 이런 것들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신지, 그것이 정말 모두가 아름다운 질서의 올바른 모습이라고 생각들 하는지, 나는 궁금하다.

권혁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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