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만이 정상적 삶'에 정면 반기

“결혼 전엔 육체적 매력, 후엔 모성성이 여성성”

결혼관 급변…가부장제 탈출…라이프 스타일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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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샤론 맥과이어 감독)는 '골초'에 '알코올 중독자' '해마다 따분한 중년 남자랑 엮어주지 못해 안달'인 엄마를 둔 서른두 살 '노처녀'이야기다.

잠옷 차림의 브리짓(르네 젤위거 분)이 '올 바이 마이셀프'를 몰입해 따라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빨리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평생 술병이나 끼고 살게 되거나, 잔뜩 살이나 찐 채 쓸쓸히 죽은 다음 키우던 개에게 반쯤 뜯어 먹힌 시체로 3주 후 발견되거나, <위험한 정사>의 글렌 클로즈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주인공의 독백이 이 시대 '노처녀'들의 잠재된 불안감을 내비친다.

▲요즘 싱글여성들은 '직장에서 집, 집에서 직장'이라는 단조로운 삶을 지양하고 삶에 활력소가 되는 이벤트 있는 삶을 추구한다. <사진·민원기 기자>

칼로리와의 전쟁에 몰두하고 완벽한 남자를 만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매번 실수를 연발하지만 '인간적'으로 정이 가는 그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30대 싱글여성들은 이와 얼마나 닮았고 얼마나 다를까. 일각에선 '20대보다는 안정됐지만 40대에 비하면 여전히 불안하고, 결혼보다 일이 우선이지만 결혼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린 것도 아니며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은 성취했으나 정서적 독립은 요원한 집단'으로 이들을 규정한다. 한편에선 결혼만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통념하에 '비정상적'이고 '미성숙한 어른'으로 이들을 묶어두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에 반기를 드는 30대 싱글여성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혼자 살면 외롭지 않느냐' '아프면 더 슬프지 않느냐' 하고 물어요. 외로움과 슬픔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인데, 왜 다들 그렇게 혼자 살면 더 외롭고 더 슬플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혼자 사니까 직장에서 일을 더 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 화가 나요. 또 혼자 살면 월급을 적게 줘도 된다고 생각하기 일쑤고, 심지어 혼자 살면 사생활이 문란할 거라고까지 추측하는데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이죠.”

매달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하는 '싱글여성모임'에선 이 같은 내용의 불만들이 터져 나온다. 사회통념상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겐 주변사람들이 함부로 간섭하고 개입해도 된다는 의식이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이들의 설명. '싱글여성모임' 회원인 곽정혜씨(33·방송작가)는 “내가 왜 결혼을 안 했는지 설명을 해야 하나 며칠 동안 혼자 분을 삭였지만, 이젠 '결혼하시니까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한번 더 하시죠?'라고 여유롭게 한 마디 던지게 됐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싱글여성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소위 결혼적령기를 나이와 연결지어 바라보는 주변의 시각이다. 회사원인 김모씨(32)는 “'빨리 결혼해 애를 낳아야지. 나이가 있잖아'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는다. 그럴 때면 내가 마치 애 낳는 기계가 된 것 같다”고 토로한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소위 결혼적령기가 결혼이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며, 결혼하기에 적합한 나이가 있다는 통념을 재생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서강대 사회학과 조옥라 교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나이는 여성의 가임 능력과 육체적 매력을 중심으로 성별화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선 결혼 전후를 중심으로 여성성의 내용이 달라지는데, 결혼 전의 여성은 육체적 매력이 여성성을 지배하고 결혼 후에는 모성이 여성성을 지배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소위 결혼적령기 아래 여성을 결혼제도에 옭아매는 사고방식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싱글여성들이 속속 늘어나는 것. 5년마다 시행되는 통계청 인구통계 자료에 따르면 30, 40대 싱글 비율은 95년 10%에서 2000년 16.4%로 증가했고, 30대 싱글여성 비율은 2000년 11월 기준 총 30만6000명으로 1995년의 20만6000여명에 비해 48.2%나 증가했다. 여성들 스스로 생각하는 결혼적령기가 29세에서 30세로 늘어났고, 초산 인구의 64%가 30세 넘어 출산을 하며 평균 싱글기간이 7, 8년 가량 된다는 보고도 있다.

학자들은 이처럼 싱글여성이 증가하는 사회적 배경으로 인생에 대한 가치 척도의 변화, 여성의 교육기회 확대와 취업률의 증가, 독신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사회여건의 형성, 독신에 대한 사회인식의 변화, 가족단위에서 개인단위로 변한 경제활동 등을 꼽는다.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슈타인은 <독신생활>에서 “결혼에서 비롯될 수 있는 제약, 즉 자기 성장과 계발에 대한 어려움, 성역할 기대치에 대한 부담감, 다양한 경험의 제한, 결혼으로 인해 고립되는 일대일 관계 등에 대한 답답함이 사람들을 '비혼'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싱글여성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결혼하지 못해 안달하는 '노처녀 히스테리'의 주인공들이 아니다. 싱글 위주의 산업이 이들의 지갑을 노릴 만큼 탄탄한 소비계층으로 성장했고 영화, 드라마 등에선 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흥미롭게 주목한다.

오는 9월 싱글여성을 대상으로 한 잡지 <싱글즈>를 창간하는 더북컴퍼니 이소영(46) 대표는 “요즘 싱글여성들은 일과 커리어에 대한 욕심이 크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직장에서 집, 집에서 직장이란 따분한 삶을 지양하고 직장 생활, 연애, 주말 등에서 스케줄 있는 삶을 원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비혼'여성에 관한 연구를 한 심경미씨(38)는 “여성들이 싱글로 사는 이유를 개인적인 차원이나 심리적인 차원으로 환원시켜 싱글여성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조장하기보다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여성이 처해 있는 상황과 조건, 독립적 삶을 살고자 하는 여성의 욕구가 싱글을 양산하고 있음을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임인숙 기자isim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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