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한 노래와 콧날 시큰한 이야기 속에

말 한 마디 살갑게 하지 못한 동생 떠올라

나는 4녀 2남 중 맏딸이다. 위로 오빠가 하나, 밑으로 여동생 둘이 있고 그 밑에 남동생 하나, 막내가 여동생이다. 자매가 넷이다.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은 둘 다 대단한 낙천가이셨다. 학벌도 빽도 지위도 돈도 없는 고단한 살림살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대한민국에서 우리 가족보다 행복한 집 있으면 나와 보라고 큰소리 탕탕 치며 사셨다. 온 가족 건강하고 화목한 것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느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이제 와 생각하니 두 분은 행복능력을 타고나신 분들이었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우리 형제들도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에 소속됐다고 믿었다. 부모님은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는데 그게 지나쳐 사소한 말다툼조차도 용인하지 않으셨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좀 깍쟁이라서 동생들이 내 물건에 손대는 걸 아주 싫어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형제간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느냐며 늘 나를 꾸짖으셨기 때문에 나는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저만 아는 이기주의자가 아닐까 자책하곤 했다.

이런 나와는 달리 내 큰동생은 마음이 아주 크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거지가 와도 밥을 정성껏 차려주었고,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서도 물건값을 절대로 깎지 못하게 했다. 나는 큰동생이 나중에 훌륭한 사회사업가가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인생이 어디 뜻대로 되나. 결혼 후 평범한 주부로 살던 큰동생이 남편과 함께 사업을 한다며 자금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한마디도 거절하지 못하고 말려들었던 것도 형제니까 무조건 도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처음엔 내가 모아놓은 여유자금으로 출발했지만 점점 더 커져 친구들에게까지 빌려서 돈을 대주었다. 결국 당시 살던 집값의 반에 해당하는 액수로까지 돈은 커져 나갔고, 한 번 나간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못 갚는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오히려 늘 눈치를 살피곤 했다. 내가 대신 친구들에게 돈을 갚느라고 얼마나 쪼들리는지에 대해서도 티내지 못했다. 그게 형제간의 도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대단한 인격자가 아니었다. 세월이 갈수록 마음 속에서는 섭섭함과 괘씸함이 점점 자라났다. 언니로서 그만한 부담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듯한 동생의 태도가 못마땅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내 마음은 차디차게 식어갔다.

더욱이 내가 갑자기 큰 곤궁에 처했을 때조차 동생이 위로는커녕 계속 도움을 바랐을 때는 인간에 대한 환멸까지 느끼게 되었다. 몇 해 전 3년 간격을 두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나는 동생에게서 아주 마음이 떠나 버렸다.

젊은 시절 그토록 자주 만나던 동생을 요즘은 집안 행사가 있을 때나 드문드문 만나면서도 내 입에서는 살가운 말 한 마디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냥 예의바른 타인처럼 데면데면 대할 뿐이다.

양희은씨가 동생인 양희경씨와 함께한 콘서트 <언제나 봄날>을 보는 동안 나는 내내 우리 자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청아한 노래와 콧날 시큰한 이야기가 서로 어우러져 봄날의 콘서트장은 감동과 행복의 기운으로 가득 찼지만 나는 가슴이 아렸다.

어려운 성장기를 함께 견뎌낸 자매가 어느 덧 쉰이 넘은 이제 옛날을 추억하며 서로 애틋해하면서 힘껏 보듬고 사는 모습이 그럴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너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며 동생을 외면하는 나, 어느덧 50대도 중반을 넘은 나는 얼마나 졸렬한 언니인가. 게다가 지금은 살기가 훨씬 나아졌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밴댕이라니.

그날 나를 콘서트에 초대한 친구는 자기 여동생을 함께 불렀다. 그 자매도 '양시스터즈'만큼이나 보기 좋았다. 그래, 무릇 자매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바보 같은 헤라니, 좀 배워라, 배워.

박혜란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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