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함과 씁쓸함…5 ·18 은 '민중항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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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주

23, 이화여대

보건교육과 4학년

“5 ·18 을 거꾸로 읽으면8·15 되는데 5 ·18 이랑8·15랑 구분하지?”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을 순수한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엔 어쩐지 씁쓸하다. 친구들에게 5월18일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자신 없게 “광주?”라고 되묻는다. 4·19와 5·18을 헷갈려하는 친구들도 있다. 또 몇 명은 “공휴일 아니지?”라든가 “네 생일이야?”라고 묻기도 한다.

이런 대답들이 내게 씁쓸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왜일까. 미리 밝히지만 나의 이 씁쓸함은 내가 어떤 투철한 역사의식이 갖고 있기 때문은 분명히 아니다

. 솔직히 내 역사의식은 투철함과는 거리가 멀다. '잊지 말고 되새기며 계승해야 할 민주주의, 저항과 투쟁의 5·18'에 대해 이토록 무지할 수 있을까라며 현재의 20대들을 향해 혀를 차며 심각한 문제라고 개탄할 자격이 나에겐 없다. 1981년 서울 출생인 나에게 1980년 5월 18일은 몸으로 부대꼈던 경험과 현실이 아닌, 일차적인 '이야기'다.

20대 한국의 대학생인 나에게 5·18에 대한 기억은 대략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인가 5·18을 더 이상 '광주사태'가 아닌 '5·18 민중항쟁' 혹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자는 뉴스를 접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책임자들이 구속되고 사망, 보상자들에 대한 보상이 결정되었다는 보도를 접했다. 내가 이 보도를 뚜렷이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언론들에서 큼지막하게 '역사의 심판'이란 제목으로 연이어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후, '5월 18일 특집 기사'란 이름으로 참혹한 사진과 80년 광주에 대한 기록들에 대한 몇 번의 기사를 더 접했다. 이렇게 알고 있었던 80년 5월 광주에 대한 역사를 시각적으로 접한 계기는 당시 높은 시청률을 보인 한 방송사의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대학생들을 향해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폭력, 피가 난자된 채 죽어가는 시민들의 모습, 공수부대원들과 싸우기 위해 돌을 줍는 어린아이의 모습 등을 영상으로 접하며 나는 막연히 5·18을 기억했다.

2000년 대학교에 입학한 후 내가 접한 5·18은 '살아 있는 비판정신과 청년다운 열정으로 5·18의 정신을 잊지 말고 계승하자'는 내용을 담은 몇 장의 대자보였다. 덧붙이자면, 몇 권의 5·18에 대한 서적들이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내 경험의 전부다.

친구의 농담 속에서 발견한 씁쓸함은 경험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역사에 대해 의식해야 한다는 어떤 강요가 부담스럽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80년, 그 계절의 젊은이들처럼 뜨겁게 시대를 고민한 경험이나 '해방과 상생'의 정신을 갖는다고 자부하지 못한 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씁쓸함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성실하게 학점관리에 열중해야 하며 취업에 모든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논리가 현실적으로 더 강한 힘을 갖는 사회현실에 대한 씁쓸함일 수도 있겠다.

2004년 20대들에게 돌아오는 5월 18일은 연기된 졸업사진을 찍는 날로, 축제날로 혹은 레포트 마감일로 우선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들에게 5·18은 '가장 경이로운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상징'이란 애절한 감동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5·18을 '광주사태'가 아닌 '민중항쟁'으로 암기하며 배웠다. 이런 그들과 함께하는 5·18에 대한 이야기는 사뭇 새로워져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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