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후유증 앓는 이들에게 평화의 비둘기를

광주 시민과 신군부 사이에서만의 전쟁
정신이상이 되거나 말문 닫아버린 동지

텔레비전에 비친 이라크 주둔 미군의 야만성을 바라보며 씁쓸하기 그지없다. 벌건 대낮 한 도시를 향해 총을 쏘아대던 야만의 군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들이 TV화면 저 너머로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체제가 1979년 10 · 26 사건으로 붕괴되고 나서 유신 잔재세력들과 결탁해 집권을 노린 일부 군부세력은 민주화 세력을 억압함으로써 부마항쟁을 유발했고 대학가는 민주화 대행진을 선포했다. 땅과 하늘이 팽팽히 긴장한 예고된 오월! 아아, 80년 오월은 이런 배경으로 출발했다. 뜨거운 오월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나는 민청학련과 긴급조치 구속자로 이루어진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여성부 간사를 맡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문학적 감수성이 많았던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쓰며 문예부장을 하고 있었고 정치의식도 싹터 가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수피아여고의 선배들은 일제 때 독립운동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감옥에 간 경우가 많았고 당시 학교는 폐교까지 되었던 역사가 있다.

학교 전통을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중에 소위 '기독교 청년(NCC)운동'과 부활절벽화사건으로 유인물을 배포하면서 정보원에 서너 번 잡혀 들어갔고, 밤새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맞고 열병으로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경찰이었다(당시 군부의 명령하에 경찰이라는 공권력과 이에 저항하는 학생운동권은 대립관계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경찰이신 아버지는 유치장에 갇혀 있는 딸을 각서를 쓰고 데리러 오실 때마다 “많이 안 맞았냐?”이 말씀 뿐, “여자애가 집안 꼴은 생각도 않고 데모나 하고 다니냐”는 일반적인 대화는 한 마디도 않으셨다. 부모님과 동생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빨갱이 딸을 두었다고 전세 한 칸 내어줄 수 없다'는 집주인의 비정함에 어머니는 울고 또 우셨다.

1980년 당시 나는 여성단체인 송백회 간사, YWCA 농촌부 위원 그리고 극단 '광대' 등에 참여했다.

여기서 잠깐 송백회에 대해 소개하자면, 송백회는 1978년 11월에 구속된 민주화운동권 인사들 옥바라지를 위한 모임으로 출발했다. 주로 모임 구성원은 사회의식이 있는 여성지도자나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의 부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인원은 60여 명에 달했다.

활동내용은 감옥에 책 넣어주기 운동, 담요, 내의, 양말 떠서 보내기 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교육사업으로는 정치, 사회, 역사 분야에 대한 그룹 스터디를 통해 사회를 심층 분석하는 능력과 사회의식을 강화했다. 매달 한 번 정기적인 강연을 통해 기생관광의 문제점을 제기했으며 농촌여성, 여성노동자연대 등도 함께했다.

송백회는 5 ·18 이후 정보원들에게 자금 조달처로 계속 감시를 받다가 결국에는 잠정적인 해체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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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에 맞서 결전의지를 다지는 광주시민군.

5월 19일 오전, YWCA 양서협동조합 사무실에서 '한씨 연대기'연극 대본연습을 하던 나는, 군인들이 바로 옆 건물 고시원에 들어가 젊은 청년들을 난타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고,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백주 대낮에 우리를 지켜주어야 할 군인들이 몽둥이로 사람을 치다니, 짐승처럼 들려오는 울부짖음에 연극단원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예비 검 속으로 광주 시내 운동권은 상당히 많은 수가 잡혀 간 뒤였고 현대문화연구소도 문을 닫아버렸다.

계엄군들의 발포가 시작되었고 사망자가 속출하고 부상자들이 수없이 발생했는데 시민들의 항거는 더욱 강해졌다. 수천 명의 시위대열은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서 군인들의 끔찍한 살인행동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했다. 그것은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온 국민이 모르는 사이에 광주 시민과 신군부 사이에서만 전개되었다. '폭도'라 규정되어 등 뒤에서 총알이 빗발치고 옆에서 동료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상황에서 나는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도망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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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청 앞 신군부 궐기대회에 운집한 광주시민들.

<사진제공·(재)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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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여학생의 빈 책상에 헌화, 묵념하는 학급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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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을 제압하고 있는 신군부 계엄군.▶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이러한 끔찍한 참상 소식을 전하지 않는 광주MBC로 달려가 화염병을 던졌다. 시위하던 중에 황금동 술집 아가씨들도 항쟁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 만나자는 말이 인사가 되어버렸다. 5일 동안의 피눈물나는 항쟁 기간 동안 송백회 회원들과 광대회원들이 도청 앞 민주수호궐기대회를 주도했고, 들불야학팀은 <투사회보> 등을 작성해서 시민들에게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이나 사태에 대한 진상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아 배포했다. 남자들이 총을 드는 대신 여성들은 뒤에서 필요한 물품보급이나 자금확보, 유인물 제작과 선전, 사망자 및 부상자 신원파악 등을 맡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계엄군이 물러가던 21일 저녁 광주는 승리의 함성으로 불타올랐고, 드디어 '해방 광주'' 위대한 광주'가 탄생했다. 그리고 5월 27일 새벽, YWCA 담장을 넘어 탈출한 나는 서울로 올라와 광주 참상을 알리고자 몇몇 동료들과 지하에서 광주항쟁 기간 동안 일어난 일을 낭독해서 테이프 작업을 했다.

그 후 나는 거의 건강을 잃어버렸다. 피신 중에 난소에 이상이 생겨 수술로서 난소 하나를 제거하고 얼마 후에 유방에 이상이 생겨 불면과 정서불안으로 하루하루 숨쉬기가 버거웠다. 그때 함께했던 동지들은 정신이상이 오거나, 결국 후유증으로 죽은 이도 있었으며, 살아남은 것이 너무 부끄러워 말문을 닫아버린 이도 있다. 오늘도 오월 후유증을 앓고 있는 송백회 여성들과 극단 광대 단원들에게 평화의 비둘기를 날려주고 싶다.

사진제공·(재)5 ·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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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희

문화유산 해설가

임영희씨는 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에 남아 있었던 '살아 있는 증인'으로 대학에 다니는 딸과 아들을 둔 엄마다. 임씨는 당시 여성단체 송백회에서 간사를 맡았고, 광주YWCA 농촌부 위원으로 극단 '광대'에서 활동했다. 현재 문화유산 해설가로 활동하면서 '여성주의 문화 해설'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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