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폭력, 더 이상 감추지 마라

퉁퉁 부은 얼굴에 멍자국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붉은 립스틱을 정성껏 발랐다. 눈썹도 길고 가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해 그려 넣었다. 귀걸이에 목걸이까지, 마치 어딘가에 제출할 증명사진을 찍듯, 머리를 매만지고 적당히 자신을 치장한 뒤에 너무 경박하게 웃지도, 그렇다고 너무 침울해하지도 않으면서, 플래시가 터질 때 하마터면 감길지 모르는 눈을 의식한 듯, 동공에 잔뜩 힘을 주는 여유까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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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부부지간에 폭력이란 게 있으면 증거자료를 모아두라고 한다. 아마 낸 골딘이라는 이 여자 사진가,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같이 살던 남자에게 실컷 얻어맞은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자신을 기록하려 한 것일까? 그러나 그녀가 왜 이런 사진을 남겼건, 사적인 그녀의 이유를 제껴 두고, 흠씬 두들겨 맞은 뒤 막 회복기에 접어든 몰골을 보고 있노라니 막연한 서글픔과 안쓰러움이 교차된다. 저 사진 속의 얼굴에서 낸 골딘이라는 여성을 떼어내고 자신의 얼굴들을 한번 넣어 바라보라.                                    구타당한 낸, 성적 종속의 발라드 중에서.▲

사진을 보는 감상자를 남성으로 놓고 봐도 어깨 힘주는 양반들 있을 것 같다. 내 치사하게 여자를 저렇게 패지는 않는다. 난 저 여자를 저렇게 만든 그 남자보다는 교양과 체면을 아는 사람이다, 라고. 그렇다면 우린 그들, 적어도 여자를 저 지경이 되도록 때리지 않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곳의 상처가 더 아플지 모른다. 우리가 가슴으로 느끼는 아픔이 저 사진처럼 고스란히 육체의 어딘가에 드러나 흔적을 드리운다면 얼마나 많은 멍자국이 생겨 있을까? 그가 나에게 가한 모진 세월의 상처들, 알게 모르게 가한 이 권위의 폭력들이 만약 고스란히 각질이라도 되어 마른버짐처럼 얼굴에 피어오르기라도 한다면? 아니, 그뿐인가? 나는 나 자신을 저렇게 때린 적은 없던가? 적당히 살아남는 법을 마치 공식처럼 외우며, 내 욕망과 내 권리를 알아서 일찌감치 포기함으로써 내가 나에게 가한 그 폭력들이 만약 저렇게 얼굴 뻔뻔히 쳐들고 모습을 드러낸다면? 낸 골딘은 일상화된 폭력, 그러나 비교적 쉬쉬하며 적당히 감추어지는 사적인 폭력을 과감히 공적 공간에 드러내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들에 대한 재고를 숙제로 던져주는 듯하다. 굳이 페미니즘 어쩌구 하면서, 맞는 여성, 때리는 남성으로 이분화시키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널 저렇게 때린 적은 없는지, 혹은 네가 날 때린 적은 없는지, 아니, 더 더욱 나아가, 내가 나 자신을 저렇게 심하게 때린 적은 없는지 물어보고 싶다. 내 몸아, 그리고 내 속아, 넌 나한테 이렇게 맞은 적 없니? 내가 혹여 모르고 그랬다면, 용서하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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