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다운증후군 화가·배우 정은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 인기
스물여섯에 시작한 그림 통해
재능 찾고 세상과 소통·성장
전업작가로서의 삶 기록한
다큐 영화 ‘니얼굴’ 26일 개봉

정은혜 작가 ⓒ홍수형 기자
정은혜 작가 ⓒ홍수형 기자

“영옥이의 쌍둥이 자매, 친언니 이영희라고 합니다. (…) 정말 추억이 남아요. 선배님들이랑 같이 하면서 오랫동안 열심히 했습니다. 감사하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우블스) 종방연에서 정은혜(32)씨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며 배우 ‘선배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그는 극중 한지민(영옥 역) 배우의 언니이자 다운증후군 화가 영희 역으로 출연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다운증후군 배우가 TV 드라마에 주조연급으로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드라마에서 장애인 역할은 비장애인이 연기해왔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은혜씨의 등장이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이유다. 다운증후군은 세계 인구 750명 가운데 1명꼴로 나타난다는데, 다운증후군의 삶은커녕 대화를 나눠본 이들도 많지 않은 현실 탓이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희(정은혜)가 그림을 그리며 눈물을 쏟는 장면. 사진=tvN 영상 캡쳐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희(정은혜)가 그림을 그리며 눈물을 쏟는 장면. 사진=tvN 영상 캡쳐

현실의 정은혜와 우블스의 영희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농담을 하고 때로는 욕설을 내뱉고 눈물을 흘리며 다채로운 감정들을 표현하는 극중 영희는 현실의 정은혜 그대로다. 발달장애인의 삶을 온전히 담아낸 그의 연기는  시청자들의 가슴에 깊이 남았다.

은혜씨의 일상을 기록한 다큐 ‘니 얼굴’ 언론 시사회를 앞두고 마주한 그는 최근 인기에도 담담했다. 드라마가 끝난 소감을 묻자, 은혜씨는 “아쉽기도 하고. 그립지만 괜찮아요”라고 했다. 연기 연습을 하며 준비했느냐는 질문에는 “연습은 따로 없었어요. 그냥 보고 외우고, 암기는 저절로 해요”라고 능청스럽게 답했다.

은혜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동생 영옥이와의 공항씬과 이정은(정은희 역) 배우와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을 꼽았다.

“쌍둥이 자매로 나온 영옥이가 공항에 저를 마중 나올 때, 이정은 선배님과 다 같이 춤 췄을 때요. 기분이 좋은 장면이었어요.”

극중 영희가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며 펑펑 눈물을 쏟는 장면의 비하인드도 살짝 들려줬다.

“처음엔 눈물이 안 나와서 아빠가 옆에서… 에이, 설명은 엄마가 해.”

은혜씨의 모친인 화가 장차현실씨가 웃는 얼굴로 옆에서 거들었다.

“그 장면 찍을 때 은혜 울게 하려고 슬픈 음악도 틀고 영옥의 칼날 같은 대사도 읽어줬는데 은혜가 표정은 우울한데도 울진 않는 거예요. 제작진이 어쩔 줄 모르니까, 서동일 감독이 은혜 옆에 쓱 가서 귀에 대고 몇 마디 하니, 은혜가 그림 그리던 붓을 훽 던지고 엉엉 울기 시작하더래요. 그 사이에 제작진은 얼른 붓을 은혜 손에 쥐어주고 촬영하고요. 하하.”

서동일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 ‘니얼굴’의 감독이자 은혜씨의 부친이다. 서 감독이 은혜씨에게 한 말은 이렇다.

“은혜야 엄마가 너보다 나이가 많지? 엄마가 너보다 먼저 죽으면 어떨 것 같아?”

은혜씨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이라고 했다.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질색하는 은혜씨에게 이 말을 했으니 울음이 터질 수밖에. 은혜씨에게 엄마 없는 삶이란, 상상하는 것조차 싫을 정도로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곁에서 뜨개질을 하며 엄마의 말을 듣고 있던 은혜씨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엄마가 죽을까봐 슬퍼서 운 거 아니야? 엄마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아?”라며 현실씨가 농담을 던져도 은혜씨는 대답 대신 “치~”하고는 뜨개질하는 손을 바삐 움직였다. 

정은혜 작가 가족 ⓒ홍수형 기자
정은혜 작가 가족. 서동일 감독과 장차현실 작가.  ⓒ홍수형 기자

스물여섯 현실씨와 스물여섯 은혜씨

현실씨가 은혜씨를 낳은 것은 1990년, 스물여섯이 되던 해였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선화예고 동양화과를 거쳐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했고 첫째 딸 은혜를 낳았다. 딸이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은 그때 알았다. 몇 년 뒤 은혜씨 부친과 헤어지고 가장이 됐지만 30대 초반의 현실씨는 혼자서도 충분히 딸을 잘 키울 자신이 있었다.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고 만평을 그리며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였다. 

장차현실씨가 첫돌을 맞은 은혜씨를 안고 있는 모습. 사진=장차현실 페이스북
장차현실씨가 첫돌을 맞은 은혜씨를 안고 있는 모습. 사진=장차현실 페이스북

“젊을 때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국가는 부모가 알아서 장애 자녀를 키우라고 하는 상황에서 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경제적 능력이 있으니 내 딸 하나쯤은 잘 키울 자신이 있었던 거죠. 구질구질한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은혜가 스무 살이 되면서 엄청 당황스러웠어요. 청년이 되자 은혜 앞으로 나온 지원비가 한 달에 딱 4만원이었어요. 그 4만원을 받아들고 든 생각이 ‘아 죽으라는 거구나’ 였죠.”

현실는 주변에서 억척스럽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딸을 키웠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함께 다운증후군을 가진 딸을 위해 장애인 교육권을 외쳤고, 통합교육을 시키고, 대학 교육까지 마쳤다. 그런데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성인이 된 발달장애인에게 손을 내미는 직장은 없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은혜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에서 무기력한 시간을 견뎌내는 일 뿐이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편견 가득한 시선은 은혜씨에게 시선강박과 조현병이라는 상처를 남겼다. 아픈 은혜씨를 치유한 건 ‘그림’이었다. 엄마의 화실을 청소하다 우연히 시작한 그림을 통해 스물 여섯의 은혜씨는 세상으로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정은혜 작가의 전시회를 찾은 노희경 작가. 사진=장차현실 페이스북
정은혜 작가의 전시회를 찾은 노희경 작가. 사진=장차현실 페이스북

4000명 그림 그리며 세상과 소통

엄마가 유명한 만화가지만 은혜씨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 없다. 화실에서 그림 배우는 꼬마들을 따라 끄적인 습작을 현실씨가 발견하면서 은혜씨는 본격적으로 그림에 빠져 들었다. 현실씨는 은혜씨 그림에 조언은 해주지만 참견은 하지 않는다. 2016년 문호리리버마켓에서 ‘은혜씨 니 얼굴’ 부스를 내고 셀러가 된 그는 캐리커처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4000장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예쁘게 그려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손님에게 은혜씨는 “늘 뷰티풀이죠” “안 예쁜 얼굴은 없어요”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꼭 “행복하세요”라고 인사한다. 4000명 넘는 이들과 눈 맞춤하며 받은 따뜻한 시선은 은혜씨가 스스로 버텨내는 힘이 됐다.

오는 23일 개봉하는 ‘니 얼굴’(감독 서동일)은 은혜씨가 화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3년 여간 문호리리버마켓에서 활동하며 4000명의 미소를 그려온 은혜씨의 작품 세계부터 특유의 긍정 에너지로 웃음 짓게 만드는 매력 등을 잘 담아냈다.

은혜씨의 일상을 영상을 담아낸 유튜브 채널 ‘니얼굴 은혜씨’도 두 달 만에 구독자 5만명을 훌쩍 넘겼다. 댓글창은 은혜씨 연기와 사랑스러움에 칭찬과 응원 일색이다. 현실씨는 아침마다 댓글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지난 30여년간 딸과 함께 세상에 부딪쳐야 했던 기억 때문이었을까.

온라인과 달리 현실은 여전히 차갑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엄마가 자녀를 살해하고 본인도 극단 선택을 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최근 2년간 20건이 넘는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양평지회장을 활동하는 현실씨에게도 이 일은 남일 같지 않다. 장애자녀의 돌봄을 오롯이 부모 몫으로만 떠넘기는 현실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블스에서 극중 김우빈(정준 역) 배우의 반응은 현실 속 나의 모습이다. 영희를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영희 누나보고 놀랐어.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있죠. 다운증후군을 처음 봤어요. 그게 잘못됐다면 미안해요. 그런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볼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학교, 집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랬어요.”라고.

은혜씨 같은 발달장애인은 ‘경계인’, 경계에 서 있는 사람으로 불린다. 은혜씨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없애고 장벽을 무너뜨리는 또 다른 경계인이 될 것이다. 현실씨는 은혜씨가 “우리 곁에 함께 살아가기에 우리에게 행복의 소스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낯선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 우리는 그 출발선에 서 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