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통신의 닉 우트가 1972년 6월 8일 베트남전에서 촬영한 '네이팜 소녀' ⓒ[AP/뉴시스]
AP 통신의 닉 우트가 1972년 6월 8일 베트남전에서 촬영한 '네이팜 소녀' ⓒ[AP/뉴시스]

네이팜탄의 불길에 타고 있는 옷을 벗어 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소녀와 아이들. 그 뒤를 힘없이 따라오는 베트남군 25사단 병사들. 사진의 가장 뒷 배경인 트랑방 마을은 검은 구름이 뒤덮였다.

베트남전 뿐만아니라 20세기 전쟁의 결정적인 이미지가 됐던 '네이팜 소녀(Napalm Girl)'의 사진이 세상에 나온지 50년이 됐다. 

1972년 6월 8일 트랑방 마을 밖에서 촬영된 이 사진은 100만 명 또는 그 이상의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간 분쟁의 트라우마와 무차별적인 폭력을 포착했다. '전쟁의 공포'라는 제목이 붙여졌지만, 이 사진은 심하게 화상을 입은 벌거벗은 9살짜리 아이에게 붙여진 '네이팜 소녀'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CNN은 8일(현지시각) 이 사진의 주인공인 판티 킴 푹(Phan Thị Kim Phúc, 59)씨, 이 장면을 포착해 세상에 알린 사진기자 닉 우트(71)와의 화상인터뷰를 통해 '네이팜 소녀' 50년을 조명했다.

킴 푹은 온몸에 화상을 입었으나 살아 남았다. 지금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살고 있다. 그는 사진을 세계에 알리고 자신의 목숨을 살린 AP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에게 감사하며 50년이 지난 지금도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평화의 메시지를 퍼뜨리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킴 푹은 "나는 그 순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화상통화에서 말했다.

킴 쿡이 어린 시절 살았던 트랑방은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시)에서 북서쪽으로 30마일도 안 되는 곳에 있었다. 전쟁 후 북부에서 온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점령됐다. 당시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남베트남군은 이들을 몰아내고 인근 고속도로를 다시 개통하기 위해 사흘째 공사를 진행했다. 그날 아침 남베트남군은 프로펠러로 움직이는 스카이레이더 비행기를 보내 적진에 네이팜탄을 떨어뜨렸다. 

킴 푹과 그의 가족은 다른 민간인들과 남베트남 군인들과 함께 불교 사원에 대피해 있었다. 머리 위로 자국군의 항공기가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병사들은 공격을 두려워하며 모두에게 도망치라고 재촉했다. 그들은 적으로 오인됐다.

"나는 고개를 돌려 비행기를 보았고, 4개의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 갑자기 사방에 불이 났고, 그 불로 옷이 다 타버렸다. 내주변에는 불 밖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라고 푹은 회상했다.

킴 푹은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화상을 입었다. 나는 흉측해 질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다르게 볼 거야. 하지만 나는 너무 무서웠다"라고 말했다.

푹은 옷을 벗어 던지고 1번 국도를 달려 내려갔다. 당시 21세였던 베트남 사진기자 우트는 마을 밖에 있던 몇몇 기자 중 한 명으로 그날 충돌을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킴이 뛰는 것을 보았고 그녀는 (베트남어로) '너무 뜨겁다! 너무 뜨겁다!'라고 비명을 질렀다고 말했다. "그녀의 사진을 찍었을 때, 저는 그녀의 몸이 너무 심하게 화상을 입은 것을 봤다. 나는 그녀를 돕고 싶었다. 모든 카메라 장비를 고속도로에 내려놓고 그녀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부상당한 아이들을 그의 밴에 태우고 30분 동안 그들을 근처 병원으로 운전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병원은 그에게 공간이 없다, 사이공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트는 의사들에게 기자증을 제시하고 다음날 전세계의 신문을 통해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병원측을 설득헸다. 우트는 2015년 베니티 페어에서 "이들 중 한명이라고 숨지면 병원이 곤경에 처할 것"이라고 설득했다고"고 회상했다.

우트는 정신 없이 셔터를 눌렀던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사이공에 있는 AP통신 사무실로 갔다. 사진은 스카이레이더 아래 공중에서 포착된 폭탄, 들것에 실려가는 희생자, 트랑방으로부터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등 그날의 많은 장면을 포착했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진들은 TV 제작진과 남베트남 군인들이 푹 주변에 모여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푹의 등과 팔은 네이팜탄의 화염으로 검게 타 있었다.

사진기자는 한 이미지가 나머지 이미지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무실로 돌아왔을때 현상기사와 다른 사람들 모두가 이 사진이 가장 강력하며 퓰리처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트는 이 사진으로 1973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또 미국의 유력일간지 20개 이상에 실리며 '올해의 세계의 사진'으로 선정됐다.

공포에 질려 울던 9살 소녀에서 원숙한 중년의 모습이 된 킴 푹은 "50년이 지난 지금, 더는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다"며 "나는 생존자고 평화를 위해 일할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한때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킴 푹은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은 한 아이가 감당하기엔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의사를 꿈꿔 의대에 진학했지만 공산 베트남정부의 정치적 선전도구로 이용되는가 하면 각지에서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1992년 캐나다로 망명을 한 이후 인생 전환점을 맞았다. 킴 푹은 자서전 '사진 속의 소녀'를 출간했고 '킴 국제재단'을 만들어 전쟁을 겪는 아이들을 도왔다.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유엔평화문화친선대사로 임명돼 전세계를 돌며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킴푹은 "이제는 뒤돌아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우트가 역사의 순간을 기록하고 전쟁의 공포를 기록해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그 순간은 내 태도와 믿음을 바꿔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꿈을 갖고 살아가게 해줬다"고 말했다.

킴푹은 당시 14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의 자국은 여전히 남아있다.

수년 동안 여러차례의 수술과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화상 부작용을 겪고 있고 최근에는 미국에서 레이저 치료를 받았다.

"나는 그 사진이 엄청난 선물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화를 위해 사용할 것이다. 사진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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