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장애인 두 번 울리는 '항거불능'

시민단체 “비장애인 법적용 무리” 거센 반발
여성장애인단체, 성폭력법 개정 캠페인 추진

정신지체 미성년자를 5년 동안 지속적으로 성폭행해 온 50대 남성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해 이를 비난하는 여론이 격화되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일제히 규탄 성명서를 발표하는 한편, 무죄의 근거로 인용된 법조항을 개정하기 위해 전국적인 캠페인을 펼칠 예정이다.

울산지법 형사1부(재판장 고규정 부장판사)는 4월 27일 내연녀의 딸인 정신지체 2급 장애인 이모(18)양을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모씨(51)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양이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낙태의 의미도 알고 있을 정도로 성교육에 대한 이해능력이 있었다”며 “정신상의 장애로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항거불능'의 상태에까지 이른 것으로 판단되지 않고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으므로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은 “정신지체 장애인인 이양이 김씨의 상습 성폭행으로 낙태수술까지 했는데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즉각 항소했다.

울산여성의전화, 울산여성회는 28일 “울산지법의 무죄판결은 그동안 성폭력의 범죄성을 알리고 성폭력을 예방하고자 했던 모든 여성단체와 여성, 그리고 성폭력피해자들의 노력을 허사로 돌리는 일”이라며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을 포함해 울산지역 15개 여성단체와 시민단체는 29일 기자회견을 갖고 울산지법 법원장을 항의 방문해 성명서를 전달했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도 28일 성명서를 내고 “정신지체여성의 경우, 장애 그 자체가 항거불능임을 인정하지 않고 비장애여성과 똑같은 법적용을 하여 무죄를 선고한 어처구니없는 판결”이라고 지적하고 “성폭력특별법 제8조에 언급되어 있는 '항거불능'은 여성장애인 관련 조항의 모순을 보여주는 불합리한 독소조항으로 반드시 개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신지체아 성폭행범 무죄판결

장애인 성폭력의 경우, '신체장애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항거불능 상태에 있음을 이용해 간음하거나 추행한 자는 처벌한다'는 성폭력특별법 제8조에 적용된다. 하지만 여성장애인단체들은 '항거불능' 상태를 입증하기 어렵고 재판관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문제 조항이라며 개정을 주장해 왔다.

박미숙 울산가정성폭력상담소협의회 회장은 “앞으로 울산지역에서 이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캠페인을 펼치는 한편, 부산·서울 등 전국의 장애인단체들과 연대해 장애인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법개정 운동 등 조직적인 활동을 펼쳐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장애인 성폭력 문제는 지난 2000년 1월 강원도 강릉시의 정신지체 장애 여성 K의 성폭력 사건이 본지에 보도되고 피해자 K가 여성인권보호사업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 이슈화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2001년 3월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 전국 4곳에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성폭력상담소가 개소돼, 피해자 인권보호와 함께 장애여성의 성폭력에 대한 사회 인식을 제고시키고 있다.

김선희 기자son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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