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거의 모든 구(區)에는 한 곳씩 '노인복지관'이 있다. 건강하신 어르신들은 이 곳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거나 취미활동을 하시고, 치매나 뇌졸중을 비롯해 몸이 허약하신 분들은 따로 모여 사회복지사와 간호사, 물리치료사의 도움으로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특별한 보살핌을 받으신다.

@A14-1.JPG

지난 주에 강의를 하기 위해 찾아간 곳 역시 어르신들의 열기가 넘쳐나는 한 '구립(區立) 노인복지관'이었는데, 아늑한 강의실에는 그 구에 속해 있는 여러 경로당의 대표 어르신 마흔 분 정도가 모여 계셨다. 참석하신 분들의 연세는 대부분 칠십이 넘으셨지만 건강은 아주 좋으신 편이었고, 남자 어르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여자 어르신은 전체의 4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각 경로당의 대표들이신 만큼 내게 주어진 강의 제목은 '리더십 함양'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나서는 옛날 개화시절 노래였다는 학도가에 가사를 붙인, 노인대학에서 요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우리의 인생은 일흔 살부터 마음도 몸도 왕성합니다. 칠십에 우리들을 모시러 오면 지금은 안 간다고 전해주세요” 하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품성을 하나씩 설명하고, 경로당의 다른 회원들과 잘 지내기 위한 '마음을 여는 대화법'으로 넘어간다. 강의 막바지에 두 분씩 짝을 지어 앞으로의 각오를 한 마디씩 나누시라고 했더니 좋은 말씀들이 많이 나온다. “우리가 먼저 친절하게 합시다!” “많이 웃읍시다!” “인사를 잘 합시다!” 그러는 중에 큰 목소리 하나가 귀에 쏙 들어온다. “나이 한 살 더 먹을수록 몸을 낮춥시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설명을 부탁드리니, “나이들수록 대접받으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거야.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내가 형이니 아우니 따지면서 싸우지 말고, 나이 많은 사람이 한 번만 더 숙이면 경로당 아니라 세상이 다 편안한 거 아니야?”하시며 껄껄 웃으신다. 다른 분들이 “맞소!” 하며 박수로 화답하신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이 한 살 더 먹을수록 몸을 낮추자'던 그 어르신의 말씀을 곰곰 생각해 본다. 내가 어르신들 앞에서 자녀들과 잘 지내는 법이라든가 생활 속의 예절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거리시지만, 때론 “왜 살날이 많지도 않은 우리들 보러 자꾸 바꾸라고 하느냐, 젊은 사람들이 늙은이들을 위해서 좀 바꾸면 안 되느냐”고 화를 내시는 어르신도 계신다. 정말 누가 바꾸는 게 좋을까.

사람은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 존재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어르신들께 좀 바꾸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선 스스로 변하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르고 편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한테 좀 맞춰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경우가 어디 흔하던가. 내가 먼저 변해야 편하고, 편해야 어르신들이 건강하게 오래 사실 수 있지 않겠는가. 두 번째 이유는 나이 많다고 해서 젊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없을뿐더러, 명령하고 지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인생길을 앞과 뒤에서 걸어가는 선배와 후배 아닌가. 앞서 가는 사람들이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길을 만들어주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라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물론 젊은 사람들이 노년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에도 고칠 것이 많지만, 우선 어르신들께 변화를 부탁드리는 것은 그 모습을 보고 걸어오는 인생의 후배들이 있기에 스스로 거울이 되어주십사 하는 내 나름의 진심이 있기 때문이다. 후배들은 그 거울 안에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유경

사회복지사, 어르신사랑연구모임 cafe.daum.net/gerontology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