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서 여성주의자들 공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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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근대 여성화가, “여성도 인간이외다”를 외친 페미니스트 운동가, 3.1운동에 동참했던 독립운동가, 자유연애를 선택, 가부장적인 규범에 저항했던 신여성.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1896∼1948)이 탄생 108주년을 맞아 다양하게 조명됐다. 지난 23일 나혜석 기념사업회 주최로 수원 경기도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제7회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을 통해서다. 심포지엄에선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탈피, 여성주의자로서 확고한 삶을 보여주었던 나혜석에 대한 논의들이 다양하게 제기됐다.

'나혜석의 자유에 관한 여성학적 접근'을 발표한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나혜석이 희생자였거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운 선각자였다는 설명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나혜석의 초기 여성의식을 여성주의적으로 역사화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파리에서의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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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경험과 의식을 역사화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갖는다. 김 교수는 “나혜석의 경험과 생각이 역사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연결되지 못 했다”고 말했다. 이는 정치적, 공적인 삶만이 역사적인 것이라 인식되는 민족주의적인 역사 서술에서 전통적인 남녀관계나 가족중심의 봉건질서에 저항했던 여성들의 경험은 정치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해진 신여성 담론 연구 또한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김 교수는 나혜석이 “식민지 조선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구체적인 그의 현실 속에 기반한 의제였다”고 말하며 나혜석의 삶은 세 단계로 분류했다. “여자도 인간일 수 있다는 가능성과 낙관, 희망을 가지고 글을 썼고, 당위와 지향, 원칙 등에 입각해 신여성과 전통적인 여성간의 차이를 분명하게 한” 첫째 시기(1914~1919), “구체적인 조선, 여성 결혼 그리고 모성에 대한 경험”을 드러낸 두 번째 시기(1920~1929), “여성의 성에 관련된 이중 규범, 남녀의 불평등,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모성에 대한 행복과 불행, 여성의 성적 욕구” 등을 말한 세 번째 시기(1930∼1938)가 그것이다.

현재까지도 나혜석의 삶과 의식은 같은 여성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그러나 당시 역사를 앞서가는 '선각자''운동가'이기보다 현실과 타협하고 갈등하는 구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줬던 나혜석은 가부장제 속에서 딸-아내-어머니-이혼한 여자, 즉 남성과의 관계로 맺어지는 여성의 정체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이것이 예술을 하는 데에 물적, 도덕적 조건과도 직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근대 '탈주'한 여성, 시대를 앞서간 여성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그녀가 그 조건에 순응하기 보다 과감히 거부했고 기존의 질서를 역행하는 자유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나혜석을 역사화 하는 것은 여성주의 역사서술의 의미 있는 고리를 찾는 작업이다.

임인숙 기자isim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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