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여성 감독 마를린 고리스의 1995년 작 <안토니아스 라인>은 주체적인 여성공동체 모델을 제시한 영화로 손꼽힌다. 안토니아스 집안의 5대에 걸친 모계 혈통은 여성 특유의 포용력과 섬세함으로 이룩된 이상적인 공동체로 다가왔다.

!B3-3.JPG

<안토니아스 라인>의 감동과 카타르시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소울 푸드>도 미국 흑인 가정 3대를 묘사하면서 공동 운명체로서 가족을 이야기한다. 할머니가 주재하는 일요일 저녁 가족 식사 모임이 주 배경이 되고 있어, 일용할 음식을 만드는 부엌 공간과 여성의 삶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또한 3대에 해당되는 현재는 손녀가 아닌 손자에게 바통을 넘기고 있어, 여성을 부엌에서 해방시키는 의미로도 읽힌다. 미국 중산층 흑인 가정의 요리를 맘껏 눈요기할 수 있는 <소울 푸드>는 조지 틸만 주니어의 1997년 작이다.

애증으로 얽힌 모녀관계를 푸는 데에는 우정이 효과적이라고 귀띔하는 영화들이 있다. 칼리 코리 감독의 2002년 작 <산드라 블록의 행복한 비밀>도 그런 영화의 하나다.

자아가 너무 강해 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어머니 비비안(엘렌 버스틴), 그런 어머니를 외면하고 살아온 딸 시드(산드라 블록). 보다 못한 비비안의 세 친구는 시드를 납치해, 비비안의 성장과정 등을 이야기해 주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앨범을 들여다보고 술을 마시고 울고 웃으며 함께 지내는 외딴 별장은, 아버지조차 들어올 수 없는 여성들만의 공간이 된다. 결국 어머니의 지난 삶을 이해함으로써, 결혼할 자신을 얻은 시드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들이 맺은 야야 자매 의식에 동참한다.

똑같은 반지를 해 끼거나, 한밤중에 잠옷 차림으로 모여 촛불을 켜놓고 우정을 맹세했던 추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철없을 때 치른 의식도 소중하지만, 성인이 되어 맺은 자매애는 남은 생을 윤택하게 해줄 힘이 된다. 데이비드 안스파흐 감독의 1995년 작 <문라이트 앤 발렌티노>의 네 여성도 그런 행운의 주인공이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대학교수 레베카(엘리자베스 퍼킨스)를 위로하기 위해 여동생 루시(기네스 펠트로우), 친구 실비(우피 골드버그), 새엄마 알베르타(케서린 터너)가 찾아온다. 이들은 함께 외식을 하고 집단장을 하면서 각자의 상처를 드러내고 싸우기도 하지만, 마침내 자신의 문제를 직시함으로써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그들만의 의식을 치른다.

조슬린 무어하우스의 1995년 작 <아메리칸 퀼트>에선 촛불의식 대신 조각이불을 만들며, 과거로부터 현재로 교훈을 전하는 여성들을 만나볼 수 있다.

대학원 논문과 청혼으로 혼란에 빠진 핀(위노나 라이더)은 외할머니(엘렌 버스틴)와 이모 할머니(앤 밴크로포드)가 사는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농장을 방문한다. 정반대 성격의 두 할머니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오랜 이웃 친구들과 아메리칸 퀼트 만드는 모임을 주재하고 있다. 핀의 결혼선물을 만드는 할머니들로부터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핀은 여성으로서 삶을 자각하고 자신의 참사랑도 깨닫게 된다.

함께함으로써 힘이 되어주는 시간, 함께 있음으로써 빛으로 가득 차는 공간, 공동체 만들기의 출발점이 아닐까.

옥선희 dvd 칼럼니스트 oksunny@ymca.or.kr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