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언니들]
정명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두 아이 키우며 일한 21년
최다 관람객 ‘대고려전’ 등 기획·개최
학예연구실 종합계획 수립 총괄

“박물관은 호기심의 방으로 가는 문
연구 잘한다고 전시 잘하진 않아
비판에 열린 자세, 공감능력 중요
동네 산책하듯 박물관 찾아
유물 놓고 수다 떨며 즐겨보길”

지난 2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정명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지난 2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정명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작가는 죽은 자들의 보물을 산 자들의 땅으로 다시 가져와야 한다.” 세계적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말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국중박) 큐레이터도 그런 사람들이다.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14세기 최상품 도자기와 동전 800만 개, 추사 김정희의 걸작 세한도, 조선의 승려 장인들이 남긴 불화와 불상... 수많은 유물을 모아 후세와 연결되는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다.

유물이 간직한 옛사람들의 소망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도 큐레이터의 일이다. 고려 여인이 쓰던 비단 스카프, 고려 후기 금동약사불에서 나온 여성의 발원문엔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되게 하소서’라는 문구도 있었어요. 그 시절 사람들도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 의미 있는 삶을 향한 희망을 품었던 거죠.”

정명희(49) 국중박 학예연구관은 “유물은 옛사람들의 시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고 말했다. “다른 곳,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을 모은 곳, 호기심의 방으로 가는 문이 박물관”이다.

올해 21년 차 큐레이터다. 한국 문화재 전시 사상 최다 관람객을 기록한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2018),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특별전 ‘영혼의 여정’ 등 여러 전시를 기획·개최했다. 2019년부터 관리자가 돼 학예연구실 종합계획 수립·조정을 총괄하고 있다. 유물·작품 관리·조사, 전시, 박물관 온라인 콘텐츠 제작도 지원한다.

한국 불교회화사 연구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림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고, 종교가 예술이 되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이달 ‘제11회 국립중앙박물관회 학술상’ 은관상을 수상했다. 

두 아이의 엄마다. 사립 박물관에서 일하다 결혼 후 국중박으로 왔다. 여성 큐레이터가 아이를 낳고도 계속 일할 직장은 그때도 지금도 많지 않다. 첫째는 올해 고3이고, 정 연구관은 여전히 좋아하는 일을 한다. 지난해 에세이 『한번쯤, 큐레이터』를, 지난 4월 에세이 『멈춰서서 가만히』를 펴냈다. 죽은 자들의 보물과 그것을 되살리는 사람들에 대한 소회를 아름다운 문체로 적었다. 

지난 24일 국중박에서 그를 만났다. 화장기 없는 낯에 날렵한 나이키 운동화를 신었다. “수장고 업무를 하는 날은 반나절에 1만 보도 걸어요.” 

박물관 큐레이터의 하루는 미디어 속 큐레이터의 우아한 모습과 좀 다르다. 일단 몸을 쓰는 일이 많다. 작품 운반, 보완, 교체, 도록 제작, 섭외, 홍보....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로 밤새워 전시를 준비하는 관행은 사라졌다지만, 더 훌륭한 전시를 위해 자신을 갈아 넣는 큐레이터들이 있다. 계획대로 되면 다행이다. 갑자기 협상이 틀어지기도 하고, 해외 항공사 파업, 화산 폭발로 비행기가 안 뜨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전시가 개막하면 미뤘던 지출 관리, 보고, 계약 등 행정 업무를 한다. 큐레이터라고 유물을 실컷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장고는 보안이 철저하다. 출입할 때마다 목적을 기록하고, 두 명 이상이 함께 가야 한다.

지난 2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정명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지난 2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정명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국립박물관 큐레이터는 전문가이자 공무원이다. 정년까지 약 5~8개 박물관을 옮겨 다니고 담당 사업과 행정 업무까지 맡는다. 팀워크가 중요하다. 국중박은 550여 명이 넘는 다양한 직렬의 일터다. 작품을 연구하고 조사해서 전시에 적절한 유물인지 확인하고, 전시를 올리고 내리기까지 고고학자, 보존과학자, 레지스트라 등이 긴밀하게 협업한다. 보이지 않는 행정 직원들의 노고도 빼놓을 수 없다.

전시 기획은 ‘프리뷰’, ‘내부포럼’이라는 내부 심의를 거쳐 관람객과 만난다. 왜 이 전시를 해야 하는지 당위성을 여러 차례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이다. “큐레이터의 시야는 자기 전공, 자신이 애정을 가진 분야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요. 외부인, 대중의 시선으로 봐야죠. 동료들의 날카로운 질문과 지적에 상처도 받지만, 개인의 역량을 뛰어넘는 좋은 결과물을 만들려면 이런 과정에 나를 빨리 노출해야 한다고 봐요.”

열심히 준비했는데 알아봐 주지 않아 서운한 적도 있지만, “관람객이 다 알아봐 줄 거라는 건 큐레이터의 환상”이다. 반면 “우리 전시를 보고 ‘나 박물관 좋아하네’ 생각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관람객 1000명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했다.  

요즘은 MZ세대를 박물관으로 끌어들일 전략을 고민한다. 유튜브 콘텐츠와 역사적 내용을 공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실감형 전시도 확대하고 있다. 정조의 화성행차도를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관람객이 주인공이 돼 전시장에서 행차를 따라 걸어보는 식이다.

“국중박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MZ세대예요. 그분들이 살면서 ‘박물관은 즐거운 곳’이라고 느낄 기회가 없었어요. 부모를 따라오거나 체험학습 말고 자발적으로 찾아와 긍정적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방문객(visitor)이 아니라 사용자(user)의 입장에서 박물관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 합니다. 디지털 모바일 기술도 더 적극 활용하고요.”

큐레이터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을 청했다. “연구 잘한다고 전시도 잘하진 않더라고요. 가장 중요한 건 공감능력입니다. 이 주제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거느냐가 큰 숙제예요. 전문가들만 익숙한 틀을 깨야 해요.”

2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매표소 앞에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홍수형 기자
2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매표소 앞에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홍수형 기자

요새 국중박은 전국에서 온 관람객들로 북적인다. ‘예매 대란’을 부른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한국-멕시코 수교 60주년 기념 ‘아스테카,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전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하반기에는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전,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과 함께하는 ‘비엔나 명화전,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물’ 등이 기대를 모은다.

정 연구관은 사람들이 동네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박물관을 찾아주길 바란다고 했다. “전시를 보고 온 사람을 만나면 차분하고 맑은 에너지가 제게 옮겨오는 것을 느껴요. 유물은 그 앞에 선 이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바깥의 어지러움을 차단하고, 온전히 멈춰서서 자기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요. 그게 박물관이 주는 힘입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했어도, 어딘가에 나를 기다리는 유물이 있을 거예요.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하루 만에 다 보려고 열심히 뛰는 분들이 있잖아요. 국중박과 지방 13개 국립박물관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거든요. 유물을 놓고 친구와 수다 떠는 것도 좋아요. 부담 없이, 박물관을 오롯이 즐겨보세요. 더 많은 분들의 생활에 박물관이 자리 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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