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총선은 이전의 국회와 다른 구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70%를 넘는 물갈이 비율, 장애인 대표의 국회 진출, 개혁세력의 과반 점유, 진보세력의 의석 확보, 젊어진 평균 연령, 초선의원의 압도적 비율 등. 또 한가지 눈에 띄는 특징은 여성들의 대거 진출이다. 수십 명에 달하는 여성 국회의원이 17대 국회에 입성하게 됨으로써, 거의 세계 꼴찌 수준이던 한국여성의 대의 비율이 한꺼번에 상당히 높아졌다.

정치시계 거꾸로 돌린 감성정치

그러나 정치판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은 편하지 않다. 총선 과정에서 대표적인 여성정치인들인 박근혜, 추미애 두 여성이 보여준 정치적 행동은, 과연 여성들이 숫적으로 많이 국회에 진출한다고 해서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 것인가 하는 우려를 하게 만들었다. 두 정치인들은 공히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했으며(한 사람은 생물학적 아버지. 한 사람은 정치적 아버지), 지역감정을 부추겼고, 선거판을 눈물의 장으로 만들어 감성적 투표를 유도했다. 두 여성의 그러한 시도는 전혀 상반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한 사람은 자신의 의석조차 지키지 못했지만, 또 다른 한 사람은 죽어가던 극우정당을 살려놓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의 차이는 호남/영남의 정치의식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일 뿐, 그 자체로는 조금도 다른 것이 아니다. 두 여성 정치인의 행보는 공히 퇴행적이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여성대표 아닌 '아버지의 딸들'

혹자는 김대중을 아버지로 표방하는 것과 박정희를 아버지로 표방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동의한다. 그러나 두 정치인 모두 아버지의 딸로서 표를 얻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여성의 대표가 아니라, 남성의 낙점을 받아 정치적 지분을 확보한, 비여성적 정치인들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가부장제의 여성대리인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녀들이 아버지들의 기반이었던 지역감정을 이용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즉, 그녀들은 <사랑받는 딸>로서 아버지 대신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졸라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적 가치란 어떤 것일까? 생물학적인 여성이 추구하는 가치는 저절로 여성적인 것일까? 박근혜 대표가 박정희 시대의 억압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독재를 미화할 때, 우리는 그녀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지할 수 있을까? 그녀가 한 사회가 힘들게 확립한 역사적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할 때, 우리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지지해야 할까? 그녀가 지역감정이라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종양과 같은 응어리를 해체시키키기는커녕, 오히려 사그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고, 그것을 정서적으로 증폭시켜 유권자들의 미분화성을 강화시키고, 그 결과로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챙기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여성의 이름으로 지지할 수 있을까?

여성이란 이유로 봐주지 말자

내 대답은 단호히 “아니다”이다. 여성적 가치란, 남성들이 지금까지 세계를 경영해 오면서 저질렀던 오류를 여성의 이름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비전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독재를 미화하고, 독재와 싸우지 않는 여성주의는 없다. 박근혜 백 명을 선택하는 대신 나는 단 한 명의 전태일을 택하겠다.

여성정치인들이 국회에 진출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가 보다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길목을 막고 있다면,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들이 참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루이14세 대신 참아야 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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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상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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