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여성국회의원 당선자가 13%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정치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인으로서 국민들을 여성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즉 여성국회의원 당선자들은 새로운 정치를 해달라는 국민들의 뜻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투표 전에도 여성이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물을 때 여성들은 '우리가 부패한 정치를 바꾸겠노라'고 대답했고 이제 당선된 여성국회의원들은 그런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그러면 여성이 정말 정치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지난주는 각종 토론회에서 4·15 총선을 평가했고 이 자리에 빠짐없이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에 대한 평가도 논의가 되었다. 이 자리에서 한 여성당선자는 여성은 남성보다 지적으로 우월한데 그것은 남성은 좌뇌만을 사용하는 대신에 여성은 좌, 우뇌를 모두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남성은 한 가지일에만 집중해서 해야 하는데 여성은 프라이팬에 반찬을 볶으면서 전화도 받고 동시에 발로는 바닥도 문지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 남성보다 많은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존재라고도 했다. 특히 여성은 아이를 잉태하고 낳으며 양육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포용하는 속성을 갖게 되어 폭력적인 남성에 비해 평화주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정치에 보다 많이 참여함으로써 “남성보다 정치적 배분을 잘할 수 있으며 평화주의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고 정책의 내용도 평화주의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기대해달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여성이 사회활동에 적절하지 못한 존재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논리가 생각났다. 여성이 사회에 참여하기보다는 가정생활에 더 적절한 이유는 우선 여성은 육체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에, 월경과 같은 생물학적인 취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임신과 육아 때문에 사회활동을 쉬게 되어 남성에 비해 사회적 경쟁력을 가질 수 없어, 그리고 지나치게 평화주의적이어서 험난한 사회적 경쟁의 세계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능주의자들은 여성들에게는 본질적으로 표현기능이 부여되어 돌보고 표현하는 일이 적절하다고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기도 했다. 결국 여성이 남성보다 지적으로 우월하거나 더 평화적이어서 한국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여성이 가정에 더 적절한 능력을 가졌다는 주장과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본질주의 견해는 여성이 정치에 더 적합한 이유가 되면서도 여성이 정치에 적절하지 않은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여성의 능력은 어찌 보면 구조적으로 여성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적인 필요와도 같은 것이다. 보살피는 능력이 뛰어나서 육아를 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육아를 전담하다 보니 보살피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여성의 본성, 남성의 본성이라고 보는 것은 어쩌면 오랜 사회화의 결과, 종의 유전자에 인식된 사회적 필요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추론일까? 분명 현재의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부패할 가능성이 적고 평화를 사랑하며, 의회 안에서 신발을 던지고 싸우기보다는 양보하고 타협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의 본성이기 때문이 아니고 여성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교육받아 왔기 때문에, 혹은 유전자 속에 그렇게 하는 것이 여성들의 사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어떤 사회화의 영향이나 외부적인 묵언의 압력 없이 여성과 남성의 자연적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이제 새로 당선된 여성국회의원들은 분명히 국회를, 한국 정치를 바꾸는 데 기여할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정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이 본질적으로 남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교육받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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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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