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NO, 꼰대문화 OFF, 편의제공·수수 OUT’
85세 이상은 51.6%, 70~74세도 12.8%가 무학인데
공공기관은 국영문 혼용시대?

우리말 '고'를 'GO'라고 써 놨다.
우리말 '고'를 'GO'라고 써놓은 서울시 행사 안내문

“건강지표 올리GO. 건강수명 연장하GO.”

“방문하Go, 찍Go, 올리Go!…'K스마일' 해요~." 한국관광공사 K스마일 실천 선서식.

“걷GO! 운동하GO! 인증하GO!” 3GO! 서울 걷길 인증샷 EVENT.

“사진도 찍GO 기부도 하GO” 한국수자원공사, 생활 속 탄소중립 캠페인.

언제부터인가 한글 ‘고’가 영어 ‘GO'로 변했다. 정부 부처 한두 곳에서 사용하더니 뒤질세라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 할 것 없이 여기저기에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구청 앞에도, 경찰서 앞에도 ’OO하GO‘라고 써놓은 현수막을 걸어 놓기 일쑤였다.

들불처럼 번지던 ‘GO’의 확산세가 다소 주춤한 듯한 가운데 최근엔 ‘DAY’가 새로운 유행어로 떠올랐다.

“대구시, 청렴도 1등급 지향 '청렴하Day' 캠페인 전개”

"코로나19 대응 개관 방역 및 운영 매뉴얼(안전하DAY)“

“학교폭력 예방, 미안하Day, 사과한Day, 고맙Day”

“부산시립예술단과 함께하는 배움DAY”

경상도 사투리인 ‘OO하데이’의 끄트머리 두 글자 데이를 영어의 DAY로 쓰거나 무슨무슨 날을 DAY로 쓰는 것이다. 심지어 개중엔 하데이를 HADAY로 쓰는 곳도 있다. GO에 익숙해진 건지, DAY도 그럴 듯하다고 여긴 건지 경상도 지방에서 등장하더니 인천 등 다른 도시에서도 사용한다.

뿐이랴. 얼마 전 대구에선 공공기관의 청렴분위기 확산에 앞장선다며 간부 공무원들이 ‘갑질 NO!’ ‘꼰대문화 OFF!’ ‘편의제공· 수수 OUT!’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안돼’ ‘그만’처럼 쉬운 우리말을 쓰거나 간단히 'X'라고 표시할 수도 있는데 굳이 NO(노), OFF(오프), OUT(아웃)이라는 영어를 끌어다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갑질, 꼰대문화같은 앞의 말에 맞게 각기 다른 영어를 찾아냈다고 뿌듯해 할지 모르지만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도 아니고 세 가지나 나오는 이 팻말의 뜻이나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알 길 없다.

우리말 고를 GO로, 데이를 DAY라고 바꿔 쓰는 곳에서는 우리 국민 모두가 영어 알파벳을 알고, 읽고, 뜻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한 우리말을 놔두고 그런 이상한 국영문 표기를 할 턱이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경상도 사투리 '~하데이'를 '~하DAY'로 표기했다.
경상도 사투리 '~하데이'를 '~하 DAY'로 표기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의 연령별 교육 정도를 보면, 65~69세의 경우 초등학교만 나온 비율이 30.5%에 이른다. 학교 근처에 못가본 무학도 5.1%다. 70~74세는 초등학교 졸업 이하가 38.7%, 무학 12.8%다. 75~79세는 초등졸 이하가 40.5%, 무학은 22.3%다. 85세 이상은 무학이 51.5%에 달한다. <2015년 통계청 인구총조사>

70대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65~69세조차 35.6%가 초등학교만 다녔거나 그조차도 다니지 못한 셈이다. 요즘에야 초등학생도 영어를 배운다지만 65세 이상은 중학교에나 가야 겨우 알파벳을 익힐 수 있었다. 결국 65세 이상 어르신(901만8000명, 2022년)의 최소 3분의 1 이상이 알파벳을 읽을 수 없다는 얘기다. 인구로 치면 300만명이 훨씬 넘는 사람이 영어문맹이라는 말이다.

현실이 이런데 길거리 간판부터 제품 이름까지 온통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투성이다. 어르신들을 눈 뜬 맹인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 없다. 우리나라 노년층 문해력이 세계 최하위라는 조사 결과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게 틀림없다. 교육부 조사에서도 50대의 실질문맹률은 8%지만 60대는 36%, 70대 59%, 80대 이상 78%로 나타났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은 안그래도 살기 힘든 세상이다. 기차표와 공연장 좌석 표시 할 것 없이 죄다 영어로 돼 있어 대문 밖을 나서기가 무섭다는 어르신도 많다.

말과 글은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국민의 17% 이상이 영어를 모르는데 민간도 아닌 공공부문에서 국영문 혼용(뜻을 지닌 단어를 발음 위주 글자로 쓰는 것이나 국영문 혼용이라고 하기도 뭣하다)을 하는 건 소통과 담 쌓는 행위이자 공공연한 차별이다.

‘올리GO, 내리고GO, 걷GO, 찍GO’라고 하지 말고 그냥 ‘올리고, 내리고, 걷고, 찍고’라고 쓰자. '청렴하DAY, 안전하DAY, 미안하DAY'같은 이상한 말 좀 만들지 말고 ‘청렴하데이, 안전하데이, 미안하데이’라고 쓰자. 기왕이면 사투리보다 표준말이 낫다. 이벤트(행사)도 모자라서 'EVENT'라고 써놓는 일도 그만두자. 공공부문에서 솔선수범하면 민간에서도 따라할 게 틀림없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