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서울 노원구·도봉구 등
지자체 ‘출산 장려’ 공공조형물 논란
여성들 “보여주기식 행정 그만...
출산 기피 현상 근본 원인인
구조적 성차별에 대한 고민 없어”

14일 찾은 부산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서암항 ‘젖병등대’(서암항 남방파제 등대). 부산시가 “저출산 극복을 위해” 2009년 건립했다.  ⓒ이세아 기자
14일 찾은 부산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서암항 ‘젖병등대’(서암항 남방파제 등대). 부산시가 “저출산 극복을 위해” 2009년 건립했다. ⓒ이세아 기자
등대로 이어진 길바닥엔 한국 출산율 현황을 표기했다. ⓒ이세아 기자
등대로 이어진 길바닥엔 한국 출산율 현황을 표기했다. ⓒ이세아 기자

부산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서암항엔 ‘젖병등대’가 있다. 흰 젖병을 닮은 높이 5.6m 등대에 젖꼭지 모양 지붕을 얹었다. 외벽엔 아기를 안고 웃는 남녀를 그렸다. 등대로 가는 길바닥엔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 연도별 출산율 현황을 표기했다.

“저출산 극복을 위해 세계 최초로 만든” 등대다. 2009년 9월 부산지방해양항만청이 건립했다. 그해 부산 출산율은 전국 최저(0.94명)였다. 부산시 측은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해 파격적인 정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지금은 안 보이지만 원래는 등대 외벽에 부산 영유아 144명의 손발 모양을 떠서 붙였다.

2009년 9월 17일 열린 젖병등대 제막식 모습. 젖병등대 외벽에는 원래 “저출산 극복을 위해” 부산 영유아 144명의 손발 모양을 떠서 붙였다.  ⓒ부산시
2009년 9월 17일 열린 젖병등대 제막식 모습. 젖병등대 외벽에는 원래 “저출산 극복을 위해” 부산 영유아 144명의 손발 모양을 떠서 붙였다. ⓒ부산시

이 등대가 저출생을 낳는 사회구조적 문제 해결엔 어떤 도움이 될까. “전혀 도움이 안 되죠. 저출생의 원인조차 모르고 만든 시대착오적 조형물입니다.” (석영미 부산여성단체연합 대표)

지나가던 여성들의 반응도 싸늘했다. “여기 들어간 세금으로 어려운 가정이나 난임 치료를 지원하는 게 더 효과적일 듯해요.”(김미지·최하연, 35·대전) “가부장적 지역색이 잘 드러나서 부끄럽네요. 여성들이 왜 임신·출산을 기피하는지 깊이 고민했다면 이 사업을 추진했을까요.” (32·부산대 대학원생 신모 씨)

정작 부산시는 “부산 이색 등대”라며 관광 홍보에 열심이다. 젖병등대는 해양수산부가 4월부터 추진하는 전국 ‘재미있는 등대 스탬프 투어’에도 포함됐다.

서울 노원구 우이천 가로공원엔 제작비 약 1억원을 들여 ‘출산 장려’ 목적으로 세운 소 모양의 ‘다둥이 가족’ 동상이 있다. ⓒ독자 제공
서울 노원구 우이천 가로공원엔 제작비 약 1억원을 들여 ‘출산 장려’ 목적으로 세운 소 모양의 ‘다둥이 가족’ 동상이 있다. ⓒ독자 제공

서울 노원구 우이천 가로공원에는 ‘다둥이 가족’ 동상이 있다. 노원구가 약 1억원을 들여 2008년 4월 세웠다. 류호열 중앙대 조소과 교수 작품으로 우이천(牛耳川) 지명에 착안해 소를 의인화했다. 아빠 소 크기만 2.1m다. “단란한 다둥이 가족 형상을 통해 출산장려와 화목한 가정의 소중함을 전달”하려 만들었다. 당시 이봉화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은 제막식에 참석해 “저출산 사회를 돌아보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해 노원구 1년치 출산장려금 예산이 2억원이었는데 동상 제작비가 그 절반에 달해 비판을 받았다.

14년이 흐른 지금 구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귀엽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보기 싫은 전시 행정”, “세금 낭비다. 그 돈을 보육 지원, 경력단절 해소에 썼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여럿 나왔다. 

서울 도봉구 방학3동주민센터 앞에는 2021년 8월 중순까지 ‘출산장려’ 임신부 동상과 그네 타는 아이들 동상이 서 있었다. 방학3동주민센터에 따르면 이 동상은 소유자가 2021년 8월 18일 세종시로 가져갔다. 현재 다른 조형물이 들어섰다. ⓒ여성신문
서울 도봉구 방학3동주민센터 앞에는 2021년 8월 중순까지 ‘출산장려’ 임신부 동상과 그네 타는 아이들 동상이 서 있었다. 방학3동주민센터에 따르면 이 동상은 소유자가 2021년 8월 18일 세종시로 가져갔다. 현재 다른 조형물이 들어섰다. ⓒ여성신문

서울 도봉구 방학3동주민센터 앞에도 9개월 전까지 ‘출산장려’ 임신부 동상이 있었다. “자녀출산”,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성스러운 선물이며 항구적인 번영의 초석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혔다. “아이는 곧 미래의 희망입니다”라고 표기된 아이들 동상도 있었다. 2007년 한 주민자치위원이 출산장려 차원에서 사비로 제작, 기증했다. 본래 문구는 “출산장려”, “성스러운 그대의 모습은 온 겨레의 소망이요 번영의 표상이다”였다. “여성을 아이 낳는 도구로 표현했다”며 지역 여론이 들끓었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근본적 문제, 구조적 성차별에 대한 고민 없이 개인 선택의 문제로 치부하고 여성이라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담긴 동상이죠. 그걸 공공 공간에 세운 데 대해 문제제기를 했고요. 비용 문제로 철거는 못 했지만 동상 형태와 문구를 수정했습니다.” 당시 항의하며 동상 철거를 요구했던 동북여성민우회의 활동가였던 권주희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장의 말이다. 이 동상은 소유자가 2021년 8월 18일 세종시로 가져갔다. 현재 다른 조형물이 들어섰다.

“보여주기식 저출생 정책 그만...
아이 못 낳거나 안 낳는 여성 소외시키고
구조적 성차별에 대한 고민 부족”

여성 정책 전문가들은 ‘출산 장려’ 공공조형물 건립은 ‘보여주기식 행정’일 뿐이라고 일침했다. 권 센터장은 “아이를 낳을 수 없거나 낳지 않는 여성을 소외시키는” 정책이라고 했다. 석 대표는 “새 정부도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인구가족부’를 만든다고 하니 퇴행이 우려된다”며 “북유럽 등 선진국이 저출생을 극복한 데에는 국가 차원의 성차별 해소 노력이 있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구시대적 방법을 쓰려는지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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