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엔 정성 가득, 부모엔 의무 방어
영화 ‘조개 줍는 아이들’ 안타까워
지극한 사랑, 일방적 의존 키울 지도
나이 들면 자식보다 자신에 투자해야

영화 '조개 줍는 아이들' 의 한 장면.
영화 '조개 줍는 아이들' 의 한 장면.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T. S. 엘리엇(1888~1965)의 시 ‘황무지’ 중 첫부분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4월이 ‘잔인한’ 이유는 무엇일지요. 아마도 죽은 땅을 뚫고 솟아 올라야 하는데다 온갖 희망을 잉태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둘 다 버겁고 힘겨운 노릇입니디. 오죽하면 추억이나 욕망이 거세된 한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고 했을지요.

시인은 4월이라고 했지만 결혼해 살아 보니 5월이 더 잔인한 달인 듯싶었습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등 뭔 날이 그렇게 몰려 있는지요. 수입은 빤한데 돈 나갈 일 투성이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시가(시댁)와 친정 어른들을 찾아 뵙거나 모시고 식사를 해야 했고요.

이것저것 신경 쓰려면 마음과 몸, 주머니 사정 모두 적잖이 힘들었습니다. 챙길 것 많은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도 걱정이었지만 그보다 5월이 더 부담스러웠습니다. 시댁 식구들과의 만남이란 아무리 편하게 생각하려 해도 마음의 추를 내려놓기 어려웠으니까요.

모든 만남은 갈등을 배태하지만 결혼한 부부와 양가 어른들과의 만남은 유독 그런 듯했습니다. 국내의 경우 설과 추석 이후 이혼율이 높아진다거나, 코로나19로 시가(처가) 식구들과의 만남이 줄어든 뒤 이혼율이 감소했다는 통계는 가족관계라는 게 얼마나 복잡미묘한 것인지 입증하고도 남습니다.

가족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영화 ‘조개 줍는 아이들’이 떠오릅니다. 미국 출신의 영국 작가 로자문드 필처의 장편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장면은 아름답고 내용은 리얼해서 잘 잊혀지지 않습니다. 1987년 원작 발표 당시 미국에서만 장장 54주 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니 굉장한 주목을 끌었던 작품임에 틀림 없습니다.

'조개 줍는 아이들' 책 표지
'조개 줍는 아이들' 영문판 책 표지. 

배경은 2차 대전 이후 1980년대 초까지의 영국이고, 주인공은 독립적이고 생활력 강한 여성 페넬로페 킬링입니다. 영화는 2차 대전 중 자원 입대한 군에서 만난 남성과 결혼해 세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된 페넬로페의 삶 및 죽음을 앞두고 그가 겪는 자식들과의 갈등을 다룹니다.

페넬로페는 씩씩합니다. 전쟁 중인 국가에 헌신하고자 입대했다가 우연히 만난 장교와 사랑에 빠져 임신하는 바람에 제대하지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만 남편은 이기적인 데다 경제력은 없고 도박벽까지 있습니다. 결국 이혼한 뒤 혼자 딸 둘 아들 하나를 키웁니다.

아이들은 잘 자랐습니다. 큰 딸과 아들은 결혼해서 중상류층 생활을 하고, 둘째딸은 패션잡지 편집장이 됐습니다. 그래도 페넬로페는 런던 외곽에서 혼자 정원을 가꾸며 삽니다. 그러던 그가 심장 이상으로 병원에 다녀온 뒤 고향인 콘웰에 가보고 싶어합니다.

엄마의 건강을 걱정하는 듯하던 자식들은 다들 바쁘다는 이유로 콘웰여행 동반을 마다합니다. 40년만의 고향 여행엔 결국 우연히 집에 들인 젊은 여성(둘째딸이 잠시 사귀던 남자의 딸)과 정원을 봐주던 청년이 동행하게 됩니다. 여행 후 그는 자식들이 그토록 탐내던 그림(아버지의 유품) ‘조개 줍는 아이들’을 콘웰의 미술관에 기증합니다. 힘들 때마다 위안과 기쁨을 줬던 그 그림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느꼈던 것과같은 즐거움과 희망을 주기를 원하면서요.

큰딸과 아들은 난리를 쳤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작품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어머니의 그림에 잔뜩 눈독을 들였던 까닭입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감춰둔 외할아버지의 스케치를 찾아내 팔기 위해 집안을 뒤지기도 합니다. 사후에 물려받으면 상속세를 내야 한다면서요. 둘이 그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선 돈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콘웰에 다녀온 페넬로페는 가슴 깊이 감춰 뒀던 옛 추억을 회상하며 눈을 감습니다. 유언장이 공개되고 자식들은 어머니의 집을 비롯한 재산을 물려 받습니다. 그런데도 큰딸과 아들은 소송을 걸겠다며 법석을 떱니다. 외할아버지의 스케치가 콘웰에 함께 갔던 정원사에게 남겨졌다는 사실을 알고서 말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둘째딸 덕에 소송까진 안간 듯합니다만.

영화를 생각할 때마다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5월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나 역시 영화 속 큰딸 비슷했던 건 아닐까. 그저 내 생각만 했던. 물려 받을 게 없어 부모님 걸 탐하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이런 생각도 듭니다. 자식에겐 뭐라도 하나 더해주지 못해서 안달이면서 부모님에겐 최소한의 의무방어전조차 힘겨워 했던 건가.

저 뿐이겠습니까. 대한민국 부모들은 자식에게 정말 지극정성인 것같습니다. 몇몇 정치인에게서 보듯 더러는 자식의 스펙을 위해, 그들이 좀더 잘 살게 해주기 위해 그야말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듯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에겐 소홀해지거나 아쉬울 때 손이나 내미는 존재로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조개를 줍는 아이들’의 원작이 미국과 영국에서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와 TV시리즈로 만들어져 호평을 받은 건 그만큼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뜻이겠지요. 영화를 함께 본 이들의 얘기나 후기를 종합하면 이랬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자식 사랑도 지나치면 안돼. 어느 정도 크면 더 이상 부모에게 기대지 말고 독립적으로 살도록 해야지. 안그러면 계속 의존적이 될 거야. 엄마라고 무작정 희생하고 헌신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아름답고 보람 있게 가꿔 나가는 게 자식들에게 부담을 덜 주는 것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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