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이의 마음대로 책 읽기] 『파친코』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애플TV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17세 선자의 모습이다. ⓒ애플TV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민진의 한국인 디아스포라 대하 서사 『파친코』는 그렇게 시작한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인용해서 더 유명해진 이 첫 구절은, 19세기 말에 태어난 가난한 영도 아가씨 양진에서 그 딸 선자, 그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에 이르는 재일교포 4대 100년간의 역사를 대하는 작가의 당당한 역사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달 말 애플TV에서 공개된 드라마 <파친코>는 말 그대로 세계적인 반향을 부르고 있다. 자이니치(在日)이라고 불리우는 재일교포의 역사는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조선)을 어떻게 침탈하고 억압하고 차별했는지 과거를 고발할 뿐 아니라 오늘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혐오와 차별의 현실을 드러낸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했어도, 세상과 맞서 싸우려 했어도, 차별을 통해 외국까지 갔어도, 자이니치가 갈 곳은 파친코 사업뿐이었다. 『파친코』는 미국 흑인 노예사를 새롭게 조명한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나 미국의 이탈리안 마피아의 뿌리를 서정적으로 살핀 <대부>에 필적하는 민족 대 서사다. 더 중요한 것은, 『파친코』가 정말로 강렬한 여성들의 이야기, 여성사(Herstory)라는 점이다. 환상적 요소를 제거한 『100년간의 고독』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양진, 선자, 경희, 동희-복희 자매, 유미, 도토야마, 에쓰코, 하나, 
이름을 입에 담아본다. 『파친코』는 일하는 여자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민진은 밥 짓고 김치 담고 빨래하고 바느질하는 ‘집안 일’을 사회적 노동으로, 여성의 직업으로 만들었다. 소설에서 여성들은 거침없이 ‘돈을 벌러’ 나선다. “양진은 선자를 돌보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하숙인들은 방세와 식대로 23엔씩 냈다.” 남편을 잃은 양진은 딸 선자를 키우기 위해 소뼈를 사다 끓이고, 텃밭 채소로 요리를 하고 빨래도 해주고 닳아서 해진 작업복도 기워서 한 해 더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고. 이민진은 여성의 노동을 구체적으로 썼다. 『파친코』에서 여성들은 이렇게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린다. 남편이 죽거나 병들어 누워도 그들은 재가를 하거나 다른 남성의 경제력에 기대지 않는다. 여성의 노동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배운’ 남성이다. 선자의 시아주버니 요셉이 그랬다. 그는 아내가 일하러 나가는 것을 끝까지 부끄러워했다. 

『파친코』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문학사상 펴냄
『파친코』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문학사상 펴냄

이제 사사로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작가 이민진의 친구로서 이 맘대로 책 읽기는 너무나 사사로운 감정이 배어있다. 2017년, 미국에서 하드커버 발매 전 평론가, 언론인에게 보내는 시험판 받아 읽고 나는 울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문장 안에 담긴, 너무도 슬프고, 쓰라린 상처와 그래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 때문에.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식사』를 펴낸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을 한 국제포럼에서 만났을 때 그는, 지혜와 통찰로 가득 찬 씩씩한 30대 여성이었다. 내가 일하던 신문에 칼럼을 써달라고 청탁했다. 한달에 한번, 한 곳도 흠잡을 데 없는 그의 유려한 글을 받아 번역을 마치고 “너는 오늘도 나를 울렸어” 하고 이메일을 보내고는 했다. 한국말을 못 하는 한국계 이민 작가로서의 아픔, 자식을 위해 헌신한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 남편과 아들에 대한 깊은 애정, 모국인 한국에 대한 그리움, 미국에서 ‘성공한 변호사’로 살기를 마다하고 작가로 변신해 8년 간 출판을 기다리던 이야기…. 이민진의 이야기는 언제나 깊다. 6.25 때 단신 월남한 아버지와 음대를 나와 피아노 교사로 일했던 어머니, 미국에 이민 가서 온 가족이 단칸방에 살던 이야기, 공부 잘하는 딸들의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모두 역사였다.

오래 기다렸던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에서, 일곱 살 선자, 당돌하고 따뜻한 열일곱 살 선자, 칠순이 된 선자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드라마 1부를 보고 나는 한국판 파친코를 밤새 다시 읽었다. 그리고 다시 울었다. ‘역사를 이겨낸’ ‘역사를 살아낸’ 여성들을 생각하며.

소설 『파친코』는 엄청 속필이다. 드라마와 달리, 소설은 20세기 초반부터 1989년에 이르는 기간을 시대 순으로 써내려간다. 17년이 첫 10페이지 안에 들어있다. 휙휙휙, 엄청난 속도이다. 역사가 망치지 못한 파친코의 여성들은 못 배우고 가난하지만, 생명력 넘치는 일하는 여성들이다. 작가 이민진이 한국에서 양반 문화를 겪지 않은 자유로움 아닐까 생각한다. 배운 여자들, 배운 남자들은 고집 세고 편벽하다. 호세아 선지자를 떠올리며 임신한 선자를 아내로 맞은 백이삭의 희생정신조차도 나는 어딘가 오만한 일이라고 투덜댄다. 이삭의 형인 요셉에 대해, 그리고 나중에 노아에 대해 나는 화가 났다. 그들의 인생 역시 역사가 망쳐놓았지만, 그들은 그럴 권리가 없는 행동을 했다.

이민진의 슬프고도 아름답고 강인한 소설 『파친코』를 애플TV로 먼저 접하는 것은 꽤 섭섭한 일이다. 이미지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맘대로 권한다. 드라마의 5~8부가 공개되기 전에 먼저 책을 읽으시라. 오사카에서 가장 더럽고 가난하고 냄새나는 이카이노에서 김치 좌판, 된장 장사로 살아가는 선자의 펄펄 뛰는 힘을 활자로 먼저 느껴보시라. 나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지난 주말 국내 대형서점 판매 1위에 소설 『파친코』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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