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규정하는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
“나를 규정하는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
  • 박성희 기자
  • 승인 2022.04.01 21:31
  • 수정 2022-04-01 2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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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애인법’ 이끌어낸 흑인여성장애인 주디스 휴먼의 외침

“사람들은 내가 세상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날 정도로 굴욕감을 느꼈다. 나비였던 나는 애벌레가 되었다.”

미국의 장애운동가 주디스 휴먼은 어린 시절 휠체어를 타고 가다가 다른 아이로부터 “너, 아프니?”라는 말을 듣었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화재 위험요인’이라는 딱지와 함께 초등학교 입학을 거절 당하고 집에서 지내던 때였다. 학교엔 못갔지만 늘 유쾌했던 소녀는 그 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털어놨다.

소녀는 그러나 애벌레로 살지 않았다. 부모가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학교에 들어갔고, 흑인장애인여성으로서 대학을 나와 석사학위를 받고 상원의원 보좌관이 됐다.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시민이 되기 위해, 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장애인의 권리 및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긴 세월 사회 곳곳의 부당함에 맞섰다.

교사자격증 발급을 거부하는 뉴욕시교육위원회와 싸워 자격증을 받고, 1977년엔 전국장애인시민연합, 1980년엔 세계장애인기구를 설립했다. 1990년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시민권법의 틀에서 보장하는 ‘미국장애인법’이 제정되기까지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미국장애인법에 서명하던 순간을 휴먼은 이렇게 썼다. “나는 마흔한살에 마침내 동등한 시민이 되었다.” 

휴먼은 1993~2001년 클린턴정부의 특수교육 및 재활서비스국 차관보, 2002~2006년 세계은행 최초의 장애와개발 자문위원, 2010~2017년 오바마 정부의 국제장애인 인권에 관한 보좌관으로 일하며 세계 장애운동의 리더로 활동했다.

‘나는, 휴먼’(원제 ‘Being Heumann’, 사계절)은 이런 휴먼이 자신의 삶 전체를 세세히 드러낸 자서전이다. 제목의 휴먼은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저자의 이름(성)이다. 휴먼은 20세기 중후반 내내 흑인, 장애인, 여성이라는 세 가지 난제를 해결해온 과정을 가감 없이 털어놨다. 휴먼의 솔직함과 작가 크리스틴 조이너의 필력이 더해졌을까. 책은 술술 읽히는 가운데 휴먼의 삶과 용기, 도전과 성취에 빠져 들게 만든다.

성공한 얘기만 있는 건 아니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늘 걱정했다. 화장실에 갈 필요가 없도록 가능한한 음료를 적게 마시려고 노력했다"는 대목은 평생 하지마비로 산 휴먼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책은 한 사람이 꿋꿋해지는데 부모의 응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도 전한다.

“어머니는 늘 말했다. 너 스스로를 돌봐야 해. 고등학교 학위로는 너 자신을 돌볼 수 없으니 대학에 가야 한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 당시 수상자라도 휠체어를 탄 채 무대에 설 순 없다는 교장의 말을 듣지 않고 휠체어를 강단에 올렸다. 부모 모두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여자는 고졸로도 충분하다는 시절이었다.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 덕에 나비인 줄 알던 한 소녀가 “너, 아프니”라는 직설적 물음에 애벌레로 변했다가 다시 나비가 돼 날아오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거라고 단정하는 남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나에겐 그 말들을 기꺼이 뒤엎을 의지가 있었다.”

이런 휴먼이지만 난관은 끝도 없었다. 장애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정당한 요구를 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타협을 모른다거나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며 모인 장애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비난 받기 일쑤였다. 물러서지 않으면 ‘끈질기다’는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눈총과 비난에 굴하지 않고 장애운동가의 길을 걸어온 휴먼의 생각은 분명하다. “장애는 누군가에게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 때문에 사회가 이런 진실을 바탕으로 인프라와 시스템을 설계하는 게 옳다.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 어떤 정부를 구성하는지는 시민 개개인의 손에 달렸다.”

휴먼의 얘기는 담담하지만 주장은 또렷하다. “장애인이 교육· 고용· 교통접근성 측면에서 마주하는 장벽은 일회성 문제가 아니다. 유니버설디자인을 하고 고용방식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도시와 사회를 분리와 고립 대신 소속감과 공동체를 키우는 방식으로 디자인할 수 있다. 비관론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옮겨갈 수 있다.”

휴먼의 잔잔한 듯 엄청난 스토리는 2020년 공개돼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넷플렉스 다큐멘터리 ‘크림 캠프’에도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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