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리지’
섬뜩하고 매혹적인 여성들과
폭발적인 록 사운드로 채운 무대
이영미·최현선·유리아 등 스타들 열연
아이돌 출신 이소정·유연정 첫 뮤지컬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리지’ 프레스콜에서 배우 유리아, 제이민이 ‘있어줄래’를 부르며 열연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리지’ 프레스콜에서 배우 유리아, 제이민이 ‘있어줄래’를 부르며 열연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아버지의 폭력, 재산을 가로채려는 계모, 위기의 자매, 무더운 여름, 동성애, 청산가리, 도끼, 피로 물든 드레스.... 뮤지컬 ‘리지’는 섬뜩하고 매혹적인 것들의 총집합이다. 어딘지 수상쩍고 조금씩 미쳐 있는 여성들이 나와서 웃고 울고 노래하고 춤춘다. 욕망과 날것의 감정이 절절 끓는다.

부모를 죽이고 가문을 풍비박살낸 여성은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당한다. 누구나 그런 이야기를 수백 개쯤 알고 있다. ‘리지’는 코웃음을 친다. 가부장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 기어코 살아남는 여성의 서사다. 자기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고, 사회의 금기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서 원하는 삶을 쟁취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불온하고 아름답다.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리지’ 프레스콜에서 배우 이영미, 전성민, 김려원, 김수연이 ‘소중한 내 동생’을 부르며 열연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리지’ 프레스콜에서 배우 이영미, 전성민, 김려원, 김수연이 ‘소중한 내 동생’을 부르며 열연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1892년 8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폴리버에서 일어난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부유하고 명망 높은 보든 가(家)의 부부가 도끼로 난자당한 채 발견됐다. 유력 용의자는 이 집의 둘째 딸 리지 보든. 그러나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아 풀려난다.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이에 영감을 얻어 1990년 탄생한 4곡짜리 실험적 록 퍼포먼스가 뮤지컬 ‘리지’의 출발점이다. 2007년 신곡 6곡을 더했다. 2009년 공연은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드라마데스크상 3개 부문 후보로 올랐다. 한국 공연은 2012년도 버전이다. 원작자인 스티븐 체슬릭 드마이어·알랜 스티븐스 휴잇(작곡), 팀 매너(대본)은 “‘리지’가 뉴욕에서부터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 관객들에게 닿을 수 있어 기쁘다”고 전했다. 2020년 초연 당시 제5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작품상을 받았다. 2년 만에 더 넓어진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무대로 돌아왔다. 무대 디자인과 연출도 조금씩 달라졌다.

뮤지컬 ‘리지’ 출연진의 ’록 컨셉’ 사진. ⓒ쇼노트 제공
뮤지컬 ‘리지’ 출연진의 ’록 컨셉’ 사진. ⓒ쇼노트 제공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리지’ 프레스콜에서 출연진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리지’ 프레스콜에서 출연진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여배우 4명만이 무대에 선다. 베테랑 배우·신예들이 함께한다.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여성들만 모았다. 전성민, 유리아, 이소정이 아버지와 계모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재판장에 서는 보든 가의 둘째 딸 ‘리지’로 분한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아버지·계모에 대한 분노에 잠긴 언니 ‘엠마’ 역은 김려원, 여은이 맡는다. 리지와 서로 의지하며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이웃이자 친구 ‘앨리스’ 역에는 제이민, 김수연, 유연정이 캐스팅됐다. 보든 가의 가정부이자 집안의 불행을 예고하는 ‘브리짓’ 역은 이영미, 최현선이 맡는다. 아이돌 출신 이소정(레이디스코드), 유연정(우주소녀)의 뮤지컬 데뷔작이다.

대사는 줄이고 노래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송-스루(Song-Through)’ 형식의 뮤지컬이다. 마르고 작은 몸에 얌전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록스타처럼 핸드 마이크를 잡고 강렬한 베이스·드럼 반주에 맞춰 폭발적인 성량을 뽐낸다. 고음과 저음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우아하게 읊조리다 돌연 터질 듯한 격정과 분노를 노래하는 배우들의 에너지가 굉장하다. 

“이기적인 손길/차가운 요구들/사랑 아냐/난 빼앗길 뿐 준 적이 없어/ 선택 따윈 없어/ 이런 인생 이게 뭐야” (‘사랑 아냐’ 중)

“왜 내 세상만 캄캄해/아빠가 빛을 죽였어/이 빌어먹을 감옥/살아선 절대 나갈 수 없어” (‘머리가 왜 없어’ 중)

“내 몸 안에/타올라 어서/타올라 어서/낡은 것들/오래된 것들/다 태워버려” (‘낡은 건 태워버려’ 중)

부모의 억압과 학대 끝에 폭발한 리지가 집을 피바다로 만드는 장면이 백미다. 아버지가 아끼던 새들을 죽이자 피 묻은 깃털을 안고 주저앉았다가 눈을 번뜩이며 활짝 웃고, 망설이는 자기 뺨을 때리며 도낏자루를 꽉 쥐고 맹렬히 휘두르는 유리아 배우의 열연에 소름이 돋았다. 살인사건 이후 보수적인 디자인의 드레스를 벗어던진 배우들이 자유분방하고 현대적인 옷차림으로 등장해 보란 듯이 무대를 누비는 연출도 매력적이었다.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리지’ 프레스콜에서 배우 유리아, 제이민, 최현선이 ‘머리가 왜 없어’를 부르며 열연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리지’ 프레스콜에서 배우 유리아, 제이민, 최현선이 ‘머리가 왜 없어’를 부르며 열연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리지’ 프레스콜에서 배우 이영미, 이소정, 여은이 ‘낡은 건 태워버려’를 부르며 열연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리지’ 프레스콜에서 배우 이영미, 이소정, 여은이 ‘낡은 건 태워버려’를 부르며 열연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2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최현선은 “소재부터 파격적이다. 좋은 음악과 무대, 연출, 연기, 통쾌함과 시원함을 느끼게 해 드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이영미는 “이렇게 음악적으로 다채롭게 잘 버무려진 뮤지컬은 흔치 않다”고 말했다.

양주인 음악감독은 “모든 미국 록 장르를 음악에 녹여냈다. ‘하드한’ 넘버들부터 밴드 편성에 첼로를 추가로 편곡해 섬세하고 드라마틱한 느낌을 전하려 했다”고 말했다. 또 “배우들과 관객들이 함께 신나게 노래하며 극을 끝내고 싶어서 커튼콜을 추가했는데 코로나19로 박수만 칠 수밖에 없어 아쉽다”면서도 “짧은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 공연이다. 꼭 공연장에 와서 함께해달라”고 말했다.

“네 여배우만으로 무대를 채우는 것은 처음이라 좋다”(여은), “몸은 힘들지만 통쾌한 기분”(전성민), “제게도 첫 뮤지컬이고, 누군가에겐 이 작품이 인생의 첫 뮤지컬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다”(이소정) 등 출연진들도 관객에게 애정 어린 인사를 전했다. (주)쇼노트 기획·제작. 김영욱·이성훈·임양혁·송한샘 프로듀서, 김태형 연출. 6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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