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경운동 편지' 2

유현준 교수 ⓒ박성희 기자
유현준 교수 ⓒ박성희 기자

 

170 대 3. 뭔가 했더니 미국 브로드웨이와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의 벤치 숫자였습니다. “벤치가 없으니 사람을 만나거나 얘기를 하려면 카페에 들어가야 한다. 돈 있는 사람은 스타벅스에, 없는 사람은 빽다방에 간다. 돈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을 틈이 없다. 그러니 서로 소통하거나 이해할 기회 또한 사라진다.”

‘알쓸신잡 2’ 출연과 유튜버로 유명한 건축가 유현준 교수(홍익대)의 얘기입니다. 얼마 전 경기도 분당의 N갤러리 15주년 리모델링 기념으로 마련된 유 교수의 ‘도시의 미래’ 특강을 들었습니다. 강연을 정말 잘하시더군요. 다양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전달 내용을 분명하고 자신감 있게 알려줘 듣는 내내 귀에 쏙쏙 박혔습니다.

요지는 이랬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세대· 남녀· 계층 간 갈등을 줄이자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오가고 모일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이 많아져야 한다. 공간은 일종의 계층 사다리다. 미래세대의 먹거리를 장만하자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지역별 위성학교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다란 선(線)형공원 및 ▲벤치 증설과 ▲물류도로 지하화 등으로 이런 소통의 공간을 늘릴 수 있다.’

전국에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위성학교를 만들면 학교 때문에 가족이 떨어져 살거나 여행 한번 마음대로 못가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제주도나 남해 한 달 살기도 가능하다는 거지요. 지방을 활성화하고 인구를 분산한다며 행정도시인 세종시와 혁신도시를 만들었지만 실제 세종시로 이사간 사람은 새 아파트를 찾아간 대전 사람들 뿐 서울 사람들은 거의 안 내려갔다는 겁니다. 결국 금요일 오후 4~5시면 세종시 청사 앞에 버스 100여대가 늘어서게 되구요.

위성학교를 만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유 교수의 주장입니다. 아버지나 엄마의 근무기간 동안 혹은 특정지역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아이는 그곳의 위성학교에 다니면서 그 지역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길다란 선형공원과 벤치를 늘리자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서울의 용산공원처럼 둥그런 공원은 그 주변 사람에게만 혜택이 주어지지만, 마포의 경의선숲길공원같은 선(線)형 공원은 공원길 전체에 효과가 미친다는 겁니다. 공원을 통해 공덕동과 연남동이 이어지면서 양쪽 사람들 모두 서로를 가깝게 여기는가 하면 주변 상가까지 죄다 활성화된다는군요. 벤치를 늘리면 낯선 사람의 소통 역시 증대된다고 했습니다.

뻔한 땅에 선형공원을 어떻게 늘리느냐. 유 교수는 물류 도로의 지하화를 방법으로 제시했습니다. 현재 도로의 상당부분을 물류 트럭이 차지하는 만큼 물류도로를 지하화하면 수송 속도도 빨라지고 지상 도로의 폭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그럼 줄어든 도로 주변에 선형공원이나 주택을 지으면 된다네요.

위성학교 개설이나 물류도로 지하화는 그럴 듯한 한편으로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지방으로 못 데려가는 건 공교육보다 사교육 문제가 크고, 물류도로 지하화는 이론만큼 간단하지 않을 것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술적인 걸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존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납득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길다란 공원을 확대하고 무엇보다 거리의 벤치를 늘리자는 주장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벤치가 없으니 카페에 가고, 그것도 돈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가는 카페가 다르니 주머니 사정에 따라 만나는 사람의 범위가 한정된다는 주장엔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끼리끼리만 모이는 세상에 벤치라도 늘어나면 모르는 사람끼리 인사라도 나눌 기회가 생기겠지요. 경의선 숲길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사이라도 개나 길냥이를 두고 대화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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