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원 | 문학평론가

지금은 버스에서 차장이 사라진 지 오래라 요즘 자라는 아이들은 그 존재도 역할도 모르지만 1970, 80년대는 어느 버스에나 차장이 손님을 내리고 태웠으며 요금을 관리했다. '오라이'라는 일본식 영어 발음으로 발차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려 준 차장. 이들이 현금을 다루다 보니 버스 요금을 중간에서 착복한다는 이유로 남성 관리자들에게 수치스러운 (알)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더구나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의 열악한 처지를 악용해 저임금과 과노동으로 수탈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성적 주체성을 수탈한 뼈아픈 역사로 차장은 기억된다.

그러나 1920년대 근대화 초기, 버스가 처음 도입된 당시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시기에도 여차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들이 신교육도 받고 얼굴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더구나 모를 것이다. 직업명도 상당히 세련된 '버스 걸'이었다.

역시 잘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겠지만 1920년대는 철도와 전차가 운행되고 택시와 버스가 다니는 등 교통수단의 근대화가 (그 수는 미미했으나)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물론 인력거와 마차와 같은 교통수단도 병존했지만.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대적으로 움직인 것 또한 이 시기의 특성이다. 하여간 이러한 교통수단의 발달과 더불어 '버스 걸'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신교육도 받고 외모도 출중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의 '버스 걸'이란 직업은 승객을 버스로 모셔 오기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만들어진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 등장한 여성의 직업은 (전문직종을 제외하면) 성적 대상화를 통한 이윤창출이나 저임금 착취를 위한 것이 많았다. 오늘날의 여성 노동도 이런 경향은 여전하다.

'버스 걸'과 근대화의 관계를 살펴보자. 조선의 버스 운행은 제국주의의 식민적 도시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아일보 1920년 6월 7일자를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시내버스 운행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대구는 내륙의 중심도시로 사과 명산지일 뿐 아니라 방직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이에 따라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자 한 일본 기업인이 시내버스 정기노선을 개설했다고 한다. 이후 1928년 초 경성부청(현 서울시청)에서 서울 시민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20인승 대형버스 10대를 일본에서 들여와서 서울시내 주요 간선도로에 투입했다.

처음에는 택시보다 요금이 훨씬 싸고 정기 노선운행으로 편리해서 호기심으로 이용하는 승객이 꽤 많았으나, 곧 버스요금보다 싼 전차 쪽으로 승객을 빼앗겼다. 1구간 요금이 버스는 7전인 데 비해 전차는 3전밖에 안 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까닭에 1년을 못 견디고 부영버스 회사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매각됐다(이런 이유로 해방 후에도 이 버스는 경전버스로 통했다고 한다).

경전버스가 된 후 손님을 끌기 위해 고안된 것이 '버스 걸'이다. 차표를 끊어주고 돈을 받던 차장을 예쁜 아가씨로 바꾸고 화사한 드러나는 신식 양복을 입혀 버스에 태우기 시작하자 버스의 손님이 대단히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한 잡지에 실린 버스 걸의 삽화를 보면 머리에는 빵똑 모자를 쓰고 허리는 잘룩하며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고 있다. 도시의 한량들, 특히 돈은 많으나 할 일은 없었던 남성들이 이들 때문에 일부러 버스를 타고 도시를 돌기도 했다고 하니, 이 시기의 '버스 걸'들은 확실히 새로운 구경거리로 소비를 창출한 것이다.

그러니 손님을 짐짝같이 다루고 아무리 불친절해도 흑자가 남은 시절의 버스 차장과는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1970, 80년대에는 교육받은 미모의 여성이 아니라 저임금에도 소같이 일 잘하는 열악한 조건의 상경 소녀들이 대부분 이 직종에서 일했다. 같은 버스 안내역이라도 그 노동이 창출되는 이유에 따라 착취되는 유형은 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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