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고도 낯선 여성성과 남성성을 마주치며

현대인들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더미 속에서, 미친 듯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경쟁체계 속에서, 매순간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고 발목을 잡는 상품과 유행 속에서 풍요를 만끽하고 순간적인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상대적 빈곤과 좌절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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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의 앙코르에서 출토된 타라 보살의 사암상(砂岩傷). 타라는 미망의 대해에 빠진 중생들에게 완벽한 지혜와 무한한 자비를 베푸는 여신이다(12세기 말, 파리, 기메 박물관).▶

신화, 환상과 무의식 가능성의 세계

역사의 세계가 논리적 합리성과 검증가능성, 그리고 의식에 기반한 현실의 세계라면 신화의 세계는 환상과 무의식에 기반한 가능성의 세계다. 신화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 신화의 이야기 구조와 철학의 논리적, 분석적 담론의 구조는 오랜 시간 서로를 배척하고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의 자유 결정권, 행위에 대한 책임과 윤리적 실천, 여타의 폭력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던 오랜 역사의 시간 속에서 신화의 세계는 운명의 폭력과 시간의 반복적 순환 구조 만을 보여주는 닫힌 세계처럼 보였고 그래서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얼마나 심각한 편견과 오만 속에서 개인의 상상력과 삶의 역동성을 제한하며 특정 체제와 특정 이데올로기만을 유일한 진실인양 선전하는가에 대한 탈근대적 비판이 날카로워지면서 신화의 세계는 역사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또 다른 시선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역사와 신화가 서로 긴밀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정체성 형성에 관여해 왔다는 사실을 다각도로 들여다 보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인류의 현실경험을 독특한 이야기의 형태로 보존하고 있는 신화의 세계는 때론 천진난만한, 때론 무시무시한 전복적 시선을 보내는 드넓고 광활한 모험의 바다이며 다양한 해석들이 경합을 벌이는 해석학의 결전장이다. 각각의 해석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 쓰여지는 생성의 샘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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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관음상은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를 모두 갖고 있다(목조, 중국, 송(宋)왕조, 시카고 미술연구소).◀

인터넷과 현실세계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수백 개의 길들을 광속으로 달리다가 허둥지둥 길을 잃기도 한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이 길이 어떤 길인지를 질문하기도 한다. 이때 시간의 덫을 훌훌 벗어버린 신화의 세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바로 그 길이 현기증나는 미로와 막다른 골목이 될 때 또 다른 트임의 공간으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모든 문화의 가장 깊은 지층에는 태고의 신화가 조용히, 혹은 격렬하게 숨쉬고 있다. 역사보다 오랜 시간의 강을 흘러온 신화의 세계에는 그 굽이마다 갈래마다 인간의 보편적 경험들이 깃들여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신화가 들려주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들은 그러나 또한 특수한 정서적 색채를 띠고 있어 신화를 접하는 각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은밀한 유혹과 위안의 시선을 보낸다.

여신도 남성 영웅의 어머니에 그쳐

신화는 무엇보다도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원형적 속성이 있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창조신화나, 씨족의 뿌리를 밝히는 족원신화 또는 샤먼의 기원을 알려주는 무조신화는 우리 모든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심원한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광대한 자연과 동물들, 주변사람들과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삶과 죽음의 신비를 묻는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 신화는 지혜롭고 원형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원형적 이야기들은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숨겨진 자아와 타자의 이미지들을 일깨워 불타는 가시덤불로 되살아나게 만든다. 그래서 신화의 깊은 바다 속을 헤엄치며 우리는 여성성과 남성성,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높고 낮음, 사랑과 성 또는 쾌락에 대해 '너무나 친숙하면서도 너무나 낯선' 감각과 생각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러면서 '나'라는 의식의 옹졸하고 비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수많은 타인들과 손잡고 기쁘게 원무를 출 수 있는 공동체의 넓은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태곳적 인류의 사회 형태는 어떠했을까? 많은 인류학적 보고서가 증언하고 있듯이 태곳적 인류의 사회는 많은 경우 모계 형태를 띄고 있었고 그래서 초기 신화의 최고 신들은 늘 여신들이었다. 이것은 여성의 출산 능력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상상력과 관념의 결과였다. 그러다가 모계제도가 부계제도로 바뀌면서 여신을 물리치고 남신이 최고의 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성이 주도권을 잡던 사회에서 남성이 주도권을 잡은 사회로 이행하면서 남녀간의 대립이 드러나고, 이것이 신화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세계의 보편적 종교로 정착된 기독교와 이슬람의 창세 신화일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출산력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파괴하면서 스스로 세계의 창조자가 되려는 남성의 욕망은 많은 종족들에게서 홍수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근동 아시아나 북미 인디언들의 신화에서 홍수의 주체가 남신인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니, 홍수를 통해 남신은 존재하는 이전의 세계를 다 파괴해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국가의 건립을 다루고 있는 건국신화에서 여신들이 주로 남성 영웅들의 신적 계보학을 위한 태조모(太祖母)로 등장하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구전되어 온 고대 신화에서 최고 신의 자리를 지켰던 여신들은 활자로 집필되는 건국신화에 이르게 되면 신성을 통해 왕권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국가 이념에 종속되어 신성한 왕을 낳은 어머니의 자리로 물러서게 되지 않던가.

여신으로 태곳적 꿈 복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주의 창조를 다루고 있는 창조 신화들에서, 그리고 수많은 일반 신화들에서 최고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여신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가부장제만을 유일한 가치로 인정하고, 여성과 남성에 대한, 혹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고착된 편견을 유포시켜 온 인류의 역사가 결코 인류가 꿈꾸고 실천한 유일한 상상력이나 삶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1세기에 우리는 평등하고 유연하며 자유로운 사회를, 그리고 보다 풍부한 다양성과 차이를 꿈꾼다. 이러한 21세기에 신화에 주목하면서 우리가 특히 여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따라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만주족과 몽골족, 그리고 시베리아 민족들이 간직하고 있는 신화의 세계를 한국의 신화와 함께 들여다 봄으로써 잊혀진/잃어버린 우리의 태고적 꿈의 이미지를 다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발 딛고 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갈구해 온 '원형'은 무엇인가. 지역적, 정서적으로 멀고도 먼 서양의 신화, 그것도 남신들의 이야기는 아니었던가. 이번 호부터 총 5회에 걸쳐 연재되는 '문화평론가 김영옥의 여신 이야기'는 역사화되지 못했던 동북아시아 여성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원초적인 생명성과 무한한 상상의 흔적을 신화 속에서 발견해 보고자 한다. 그 가운데 여신들은 오늘날 고착된 남녀의 성역할과 우리 문화의 정형을 과감하게 전복시키는 단초들을 제공할 것이다. 필자 김영옥씨는 독문학자이며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다.

<편집자 주>

김영옥|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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