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미성년 작가 저작권 편취’ 사건
9년 만에 1심 승소한 A웹툰작가
만화가협회 등 웹툰 종사자들도 연대
“힘없는 작가 권리침해 더 없어야”

미성년 웹툰작가의 저작권을 편취해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레진코믹스’ 창업자 한희성 레진엔터테인먼트 이사회 의장이 지난 11일 1심에서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주)레진엔터테인먼트/문화체육관광부
미성년 웹툰작가의 저작권을 편취해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레진코믹스’ 창업자 한희성 레진엔터테인먼트 이사회 의장이 지난 11일 1심에서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주)레진엔터테인먼트/문화체육관광부

만 17세 웹툰작가의 저작권을 침해해 수익을 빼앗은 전직 웹툰 플랫폼 대표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와 웹툰업계 종사자들이 4년간 싸워 얻은 승리다. 힘없는 창작자에 대한 ‘갑질’은 처벌받는다는 판례로 남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5단독(주진암 부장판사)는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레진코믹스’ 창업자 한희성 레진엔터테인먼트 이사회 의장에게 지난 11일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한국만화가협회는 “‘갑’의 위치를 활용해 힘없는 신인 작가들의 저작권리를 침해하는 행위가 더는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경종을 울린 판결”이라고 환영했다. A작가는 여성신문에 “힘없고 경험도 없는 한 고등학생이 겪었던 일에 함께 분노해주신 여러분께 아무리 감사를 드려도 모자라다”며 “두 번 다시 플랫폼 대표의 지위를 이용해 관행을 운운하며 힘없는 작가의 저작권을 편취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A작가는 2013년부터 6개월간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한 웹툰 ‘나의 보람’을 연재했다. 레진코믹스 창업자 한희성씨는 당시 웹툰 연재분마다 자신의 필명 ‘레진’을 표시해 공동 저작자로 행세했다. 2022년 현재 모두 삭제됐다.  ⓒ(주)레진엔터테인먼트
A작가는 2013년부터 6개월간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한 웹툰 ‘나의 보람’을 연재했다. 레진코믹스 창업자 한희성씨는 당시 웹툰 연재분마다 자신의 필명 ‘레진’을 표시해 공동 저작자로 행세했다. 2022년 현재 모두 삭제됐다. ⓒ(주)레진엔터테인먼트

캐릭터 이름 등 아이디어 내놓았다고
글 작가로 표시수익 15~30% 가져가
피해자 문제제기에 “업계 관행” 뻔뻔 답변
대표 지위 이용해 미성년 작가 압박

A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만화를 올렸다가 2012년 한씨에게 웹툰 연재 제안을 받았다. 2013년부터 6개월간 레진코믹스에서 웹툰 ‘나의 보람’을 연재했다.

한씨는 웹툰 연재분마다 자신의 필명 ‘레진’을 표시해 공동 저작자로 행세했다. 캐릭터 이름 등 일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는 이유로 수익의 15~30%(약 740만원)을 가져갔다. A작가는 “대표님은 스토리나 대사 작업을 하지 않았는데 글 작가로 이름을 올리고 돈을 가져가는 게 맞냐”고 따졌다. 한씨는 “작가님이 잘 모르는데 이게 업계 관행”이라고 우겼다.

A작가는 겨우 17세였다. 복잡한 계약 문제를 의논할 동료도 없었다. 당시 레진코믹스는 네이버웹툰, 다음웹툰에 비견되는 영향력 있는 플랫폼이었다. 신인 작가가 유력 플랫폼 대표의 뜻을 거스르기란 어려웠다.

성인이 된 그는 2017년 12월 레진코믹스에 계약 해지와 시정을 요구했다. 레진코믹스 측은 A작가의 요구를 받아들이려는 듯하더니 돌연 ‘한씨가 공동저작자가 맞다’고 주장했다. A작가는 결국 2018년 12월 한씨를 고소했다.

길고 답답한 싸움이었다. 고소하러 간 강남경찰서는 ‘버닝썬’ 사건으로 바빠 수사가 더뎠다. 경찰들은 ‘뭘 이런 일로 고소를 하느냐’고 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한씨와 레진엔터테인먼트를 ‘거래상 지위남용행위’로 신고했으나 4개월 만에 “공정거래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는 답변만 받았다. 검찰도 피해자 소환조사 한번 없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A작가는 즉시 항고했다. 한국만화가협회, 한국여성만화가협회, 전국여성노동조합 산하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등 단체와 동료 작가들의 도움으로 의견서, 탄원서를 다수 제출했다. 웹툰 제작 과정, 글 작가와 그림 작가의 역할, 왜 한씨가 단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2019년 12월, 한씨는 저작물의 ‘성명표시권’을 침해한 혐의로 벌금 50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한씨가 무죄를 주장해 정식 재판이 시작됐다. 법원은 3년 만에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한씨가 “설득력 없는 논거를 제시하며 범행을 부인하고, 웹툰 플랫폼 경영자로서 웹툰의 저작자 표시에 관한 사회 일반의 신뢰를 상당기간 동안 손상했고, 형사고소 후 저작권자 표시를 정정하고 저작권료를 지급받지 않은 점” 등을 꼬집었다. 벌금도 1000만원으로 늘었다.

한씨는 재판 내내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1심 최종변론에선 “내가 작가들이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도와줬는데 이 재판을 하면서 인간불신에 걸렸고 만화에 대한 애정도 사라졌다”, “나를 지지하는 작가들이 많은데 여론이 겁나서 말 못할 뿐”이라고 항변했다. 판사는 “왜 피고는 돈 이야기만 하느냐, 창작자로서 꿈과 열정보다 돈 얘기만 한다”고 일침했다.

한국만화가협회는 “단순 아이디어를 제공한 후 이를 이유로 자신을 저작권자로 표시한 경우는 만화·웹툰 업계에서도 전무후무한 사례이자 발생해서는 안 되는 사례다. 특히 당시 작가는 미성년자였다는 점에서 한씨의 행동은 법적으로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A작가를 대리한 김종휘 법무법인 마스트 변호사는 “(한씨가) 무거운 벌을 받았다고 보긴 어렵지만, 웹툰 산업 내 저작권법 위반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공정한 판결이 나왔다”고 말했다. 한씨가 18일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유죄 판결을 뒤집긴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만화가 좋아서 오늘 이 순간까지 왔습니다. (...) 이 땅의 만화가들이 오랫동안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만화를 그려나갔으면 하기에 앞으로도 그의 항소에 맞서 긴 시간 동안 끝까지 힘을 내고 싶습니다.” (A작가)

재능있지만 힘없는 미성년자 작가들은 여전히 보호 사각지대에 있다. A작가는 데뷔를 원하는 작가 지망생들이 플랫폼이나 PD의 성향에 맞춰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저작권 침해가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시장도 커지고 간절한 지망생들도 많아졌기 때문에 사각지대는 더 커졌을 것”이라며 “웹툰 산업의 크기와 성장 속도에 비해 작가들을 보호하는 울타리는 단단하지 않다. 제 사건이 업계 현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웹툰 창작자 권리 지키면
되도록 표준계약서 이용해야
만화가협회, 저작권 특강·법률자문 제공
플랫폼도 권리 보호 힘써야

그간 웹툰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21년 10월 저작권자의 2차 저작물 권리 명시 등 창작자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의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를 공개하고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만화가협회(https://www.cartoon.or.kr/)도 정기적으로 저작권 특강을 열어 저작권법 기본 개념부터 계약서 작성법, 저작권 침해 대응 방법 등을 알리고 있다. 협회 자문 변호사를 통해 계약서 검토, 저작권 분쟁, 부당 대우, 저작권 불법 사용 등 법률 자문도 상시 제공한다. 해외불법복제 침해 대응을 위한 행정업무 신청 대리, 작가 저작권 보호를 위한 비정기 캠페인 등을 기획·진행한다.

플랫폼의 책임 있는 자세도 중요하다. A작가는 “신인 만화가들은 작업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일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상담받는 게 중요하다. 웹툰 플랫폼들 또한 나서서 고립되기 쉬운 만화가들이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주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