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 탑재도 시간이 필요해"... 명대사와 함께 읽는 육아에세이
"모성 탑재도 시간이 필요해"... 명대사와 함께 읽는 육아에세이
  • 박성희 기자
  • 승인 2022.01.15 09:08
  • 수정 2022-01-15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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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천준아의 '육퇴한 밤 혼자 보는 영화'

"네 이웃의 그릇을 쳐다 볼 단 한 가지 이유는 그 사람이 부족하진 않나 확인할 때밖에 없어."
방송작가 천준아 씨가 쓴 『육퇴한 밤, 혼자 보는 영화』(송송책방) ⓒ송송책방
방송작가 천준아 씨가 쓴 『육퇴한 밤, 혼자 보는 영화』(송송책방) ⓒ송송책방

‘여자이기 때문에 모성은 기본 탑재되는 줄 알았다. 갓 태어난 아이를 가슴에 안을 때 모성은 이미 와 계신 줄 알았다. 하지만 가뜩이나 둔한 나같은 캐릭터에게는 모성애라는 것도 더디 오더라. 전적으로 시간이 필요했다. 한방이의 태동도 못 느끼고, 아이 얼굴도 못 알아볼 만큼 둔감했던 나란 어미도 한방이와 살을 부비적대다 보니 적어도 녀석에게만큼은 초 민감한 어미로 변모해 갔다. 남편의 서라운드 코골이도 못 듣는 내가 한방이의 울음소리에는 자동 기립을 하게 될 줄이야.’

방송작가 천준아 씨가 쓴 ‘육퇴한 밤, 혼자 보는 영화’(송송책방)는 흥미진진하다. 30대 후반에 출산한 40대 엄마의 육아 에세이는 ‘엄마는 이렇다’ 혹은 ‘이래야 한다’는 통설에 그야말로 한방을 가한다. 한방이는 작가 아들의 태명이다. 한방에 들어섰다고 한방이란 태명을 붙였다는 고백부터 범상치 않더니 읽는 내내 “으음, 그렇지” 내지 “이럴 수도 있구나” 싶게 만든다.

제목의 육퇴는 육아퇴근의 약어다. 칭얼대거나 보채는 아이를 겨우 잠재운 뒤 혼자 보는 영화란 뜻이다. ‘아이 키우다 현타 온 엄마를 위한 대사들’이란 부제가 달렸다. 현타는 현실자각타임의 약어. 영화 소개 프로그램 작가인 저자가 온몸으로 부딪히며 깨달은 ‘육아의 현실 및 엄마로서의 삶, 아이의 신비’ 등을 영화 대사와 함께 솔직· 유쾌하게 털어놨다.

모성 탑재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할 땐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가져온다. 아내가 훌쩍 떠난 뒤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회사엔 노상 지각이요, 사생활과 사회생활은 사라진지 오래요, 휴식 또한 잊은 크레이머(더스틴 호프만)는 갑자기 나타나 아이를 데려 가겠다는 아내(메릴 스트립)와 양육권 소송을 벌이던 중 이렇게 묻는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부모가 되는 건가요? 저도 완벽한 아빠는 아니죠. 가끔은 인내심을 잃고 빌리가 애란 걸 망각하기도 하죠. 하지만 전 곁에 있어요. 아침을 먹고 얘기를 하고 같이 등교를 하죠. 밤엔 책도 읽어 줍니다. 우린 함께 삶을 만들었고 서로 사랑하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적질과 참견, 특히 양육에 대한 온갖 간섭에 대해서도 일침을 날린다.

“한방이가 걸음마를 떼다가 엎어지면 엄마가 돼서 자기 새끼 엎어졌는데 달려오지도 않는다고 혀를 끌끌 찼다. 시간제 보육서비스를 신청했더니 순식간에 자기 커리어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엄마가 되었고, 한방이가 조금 더 크니 이젠 그 흔한 태권도, 피아노조차 안 가르치는 게으른 엄마로 둔갑했다.”

저자는 ‘모든 분야에서 꼰대들의 활약은 지칠 줄 모르지만 유독 결혼과 육아 분야에선 ’꼰대 오브 더 꼰대‘가 곳곳에 존재한다며, 그런 꼰대에게 날리는 핵사이다같은 대사로 영화 ‘주노’의 새엄마가 주노의 초음파 검사 담당자에게 쏘아 붙이는 대목을 인용한다.

“초음파 기사라구요. 난 손톱 기술자예요. 우리 둘 다 자기가 잘하는 일에나 신경 쓰자고요. 당신이 특별난 줄 알아요? 저 화면 하나 볼 줄 안다고?”

갑자기 들이닥친 병을 마주하면서 “왜 하필 나죠”라고 되묻던 저자는 영화 ‘루이’ 속 대사를 통해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루이는 두 딸을 둔 아빠다. 요리하면서 숙제하라고 외치는 아빠 루이의 말에 큰 딸 릴리는 재빨리 테이블 앞에 앉는 이쁜 짓으로 하나 남은 망고팝을 받아 먹는다.

동생 제인은 망고팝을 못 받자 불공평하다며 떼를 쓴다. “네가 운이 없었던 거지”라며 달래도 듣지 않는 제인에게 루이는 말한다. “넌 다른 사람이 받는 거에만 관심이 있구나. 잘 들어. 네 이웃의 그릇을 쳐다 볼 단 한 가지 이유는 그 사람이 부족하진 않나 확인할 때밖에 없어.”

“왜 하필 나인가”를 “왜 나면 안되는가, 그럼 남은 그래도 되는가”라고 바꾸는 순간 한 없는 괴로움의 동굴에서 빠져 나오게 되더란 얘기다.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는 엄마들이 허다하다는 요즘, 작가의 ‘온몸으로 체득한 육아론과 여성이자 엄마로 거듭나는 방법’은 전문가의 상담과는 또 다른 공감과 웃음에서 비롯되는 치유법을 선사한다. ‘최선의 태교는 지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며 남편의 온갖 아르바이트 얘기를 졸라서 들었다는 작가의 남다른 인생관과 영화 프로그램 전문작가의 박학다식함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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