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여성신문 공동기획
[여성농업인, 농어촌 미래의 힘이다]
한영미 (사)횡성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 대표

한영미 (사)횡성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 대표 ⓒ여성신문
한영미 (사)횡성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 대표 ⓒ여성신문

사람과 사람, 마을과 행정, 농촌과 도시를 잇는 사람. 한영미(55) 횡성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 대표를 설명하는 말이다. ‘연결’과 ‘연대’는 한 대표의 30년 농촌 생활을 축약하는 표현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농활을 통해 농촌의 현실을 생생히 접했다. 강원도 횡성에 먼저 자리 잡은 남편 구현석씨를 만나 1992년 결혼하면서 횡성군 공근면 오산리에 정착했다. 귀농이라는 말 대신 이른바 ‘농투신(농촌투신)’이라는 표현을 쓰던 시기였다. 그 후 30년 가까이 농민이자 농민운동가로서 한자리에 뿌리내렸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좋아해요. 재능과 능력을 가진 분들을 서로 연결하면 시너지가 날 수 있잖아요.”

스물여섯, 도시에서 온 여성의 눈에 비친 90년대 횡성은 척박했다. “마을 행사를 할 때면 마을 개울에 나가 쌀과 채소를 씻어야 했어요. 지금은 개울에 발 담그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바뀌었지요.” 지금 그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양으로 750평 땅에 벼농사를 짓는다. 밭 2000평에는 콩을 심고 대추를 키운다. 올해는 1000평을 토종 종자를 채취하기 위한 채종포로 제공했다. 

한영미 대표가 횡성 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가 찾아가는 작은문화교실을 진행하는 모습. ⓒ한영미
한영미 대표가 횡성 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가 찾아가는 작은문화교실을 진행하는 모습. ⓒ한영미

1992년 결혼하며 횡성에 정착
20대 청년과 70대 언니의 ‘연대’

외지에서 온 젊은 여성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여성농민회) 활동을 하면서도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마을 ‘언니’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마을 여성들을 ‘언니’라고 불렀다.

“마을언니들과 친했어요. 언니들은 60~70대로 나이차는 있었지만 함께 소형 승용차 한 대를 타고 다니며 장을 보고 철마다 여행을 가고 시내로 건강검진도 다녔어요. 그때 정말 좋았어요.”

당시 한 대표는 농사를 짓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농촌에 사는 나 같은 사람들이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고민했고, 자신의 삶과 마을에 필요한 것들을 행정과 연결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농사를 하러 갈 때 아이를 돌봐 줄 어린이집이 절실했고, 아이들과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과 아이들의 학습과 돌봄을 지원해줄 공부방도 필요했다. 10년여의 노력 끝에 2002년 공모사업에 참여해 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가 세워지며 고민거리도 하나씩 풀어나갔다.

“10년간 말 그대로 불철주야 열심히 활동했다”고 했다. 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는 여성농민을 연결하고 연대하도록 돕는 플랫폼이다. 농사일과 가사일을 도맡아야 하는 여성농민의 고된 삶에 숨 쉴 틈을 마련해주고, 농사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행정적 지지를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센터 부설 보리어린이집이 세워졌고, 주민들에게 책을 대여하는 쌀보리도서관, 방과 후 학습과 돌봄을 지원하는 쌀보리공부방이 만들어졌다. 전통음식 전수사업, 도농 직거래 사업 등과 함께 토종종자를 복원하는 토종씨앗지키기 운동도 사업으로 시작했다. 특히 토종종자지키기 사업은 횡성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됐다. 오랫동안 지역풍토에 맞는 종자를 개량하고 보존하면서 지역공동체를 유지 발전시켜온 여성농민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대부분 종묘상에서 파는 개량된 종자는 채종했다하더라도 같은 종자의 특징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아 매년 비싼 종자를 구입해 쓸 수밖에 없다. 토종 씨앗은 매년 받아서 심는 씨앗이다.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맞게 적응한 종자지만, 씨를 받기 위한 기다림과 추가노동이 필요하다. 토종씨앗지키기 사업은 농민들에게 씨앗에 대한 권리를 돌려주고 여성 농민들의 좋은 씨앗을 고르는 식견과 가치를 복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횡성 지역에서 나는 토종 콩들.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gabapentin generic for what gabapentin generic for what gabapentin generic for whatprescription drug discount cards blog.nvcoin.com cialis trial coupon ⓒ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횡성 지역에서 나는 토종 콩들. ⓒ 여성신문 

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 이끌고
언니네텃밭‧토종씨앗지키기도

한 대표는 센터 대표로서 보낸 앞선 10년의 세월을 “보람은 컸지만 잃은 것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센터 일에 몰두하는 사이 함께 했던 언니들 여럿은 그곳을 떠났다.

“2002년부터 10년 세월을 센터 일로 정신없이 보내는 사이 언니들 여럿이 떠났어요. 가족이 해체돼 떠난 분도 있고 돌아가신 분도 있고. 그들이 떠나는 사이 도대체 난 뭐하고 살았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거점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일이 찾아뵙지 못했어요. 언니들의 활동 공간인 공근면과 센터가 있는 횡성읍이 거리로는 가깝지만 센터에서 교육을 진행해도 언니들이 쉽게 참여하진 못했어요. 10년이 지나서야 언니들이 떠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매개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통음식전수사업으로 두부공장을 열고 언니네텃밭을 시작한 여러 이유 중 큰 부분이죠.”

언니네텃밭은 어려운 농촌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생산협업공동체다. 토종 씨앗을 지키고 식량 주권을 회복하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고자 여성 농업인들이 힘을 모았다. 여성 농업인의 이름으로 농축산물 꾸러미를 도시에 보내고, 여성농민이 키운 콩으로 전통방식의 두부를 만들어 원주횡성지역에 공급한다. 여성농민을 대상으로 종자기능사 양성 과정도 진행했다. 그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앞으로는 횡성 지역의 특성을 살린 씨앗을 바로세워야 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처음 언니네텃밭 꾸러미 사업을 시작했을 땐 주문 시 요청 사항에 ‘양 많이’라고 적는 분들이 많았어요. 다다익선이라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많이 보내는 걸 오히려 싫어하는 분들이 있어요. 어차피 남아서 버린다고요. 예전엔 흙이 묻은 무를 종이에 싸서 보냈는데 지금은 깨끗하게 다듬어진 포장을 원하세요. 소비자의 요구에 맞춰 꾸러미도 달라졌죠. 코로나 확산 이후에 주문량이 늘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큰 변화는 없어요. 언니네텃밭은 제철채소를 중심으로 밥상을 바꾸는 운동을 지향했는데 그런 부분에선 부족했다는 반성도 합니다.” 

한영미 대표가 소속된 오산공동체 '언니'들. ⓒ한영미
한영미 대표가 소속된 오산공동체 '언니'들. ⓒ한영미

사서 고생? 누구라도 할 일!
‘배워서 남 주자’는 삶의 모토

주위에서 “사서 고생”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를 비롯해 토종씨앗지키기 운동과 언니네텃밭까지. 최근 농촌형 성평등 교육 강사 교육을 받아 강단에도 섰다. 지난해에는 횡성군 여성농업인단체협의회, 강원여성가족연구원과 함께 농촌형 여성친화도시 특화사업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로, 올해 횡성군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실현을 위한 횡성형여성일자리사업과 성평등한 마을만들기사업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 한 대표는 “여성일자리사업은 횡성군 주민복지과가 주관하고 있지만 여성농업인들의 요구로 만들어진 정책 사업인 만큼 보람있고 뿌듯하다”고 했다.

두 자녀를 키우는 엄마이자 농민이고, 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 대표이자 여성농민운동단체 활동가인 한 대표는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이라며 “농촌에는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잘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맡은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담백한 설명이었다.

“농촌에선 농사를 짓느라 하고 싶어도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여건이 되고 또 제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거죠. 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하다보니 책임감도 있고요.”

하지만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해낼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횡성에 정착하며 만난 동네 언니들, 여성농민회 활동하는 동지들, 난생처음 글을 배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시를 써내려 간 할머니들, 환갑 넘어 칠순까지 공부방에서 강사로 일하며 배움을 놓치 않았던 선생님, 남편 간병을 병행하면서도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웃음을 잃지 않은 언니까지 모두 제 롤 모델이었어요. 그 분들을 닮고 싶었죠.”

센터 사무실에 걸린 ‘배워서 남 주자’라는 글귀는 삶의 모토가 됐다. 그는 자신의 롤 모델인 언니들에게 “자신부터 돌보라”고 늘 당부한다. 팔팔했던 언니들은 이제 몸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하는 나이가 됐고, 그 중 몇몇은 함께 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한 대표는 “최근 밸런스 워킹 피티라는 건강체조를 공동체 언니들과 시작했다”며 “가족 건강 챙기느라 자기돌봄에 소홀한 여성농민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 대표는 지난 30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참 보람있었다”고 말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일을 시작할 때도 많았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기여도 했어요. ‘보람있다’는 표현을 흘려 들었는데 제 삶을 정리해보면 무슨 일이든지 ‘보람’이 기준점이 되더라고요. 버거울 때도 있고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보람있는 일이라면, 누군가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해내고 싶어요. 저 혼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라면 해낼 수 있는 힘도 커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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