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방지법’ 1년...체감효과 ‘글쎄’
“초범·전과 없음·부양가족”
뻔한 ‘감형 전략’ 아직 먹혀
아동 성착취물 보고 삭제했다고
영상 속 ‘피해자 특정 어려워’ 황당 감형도

2018년 8월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현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8년 8월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현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사회 각계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엄벌하라는 요구가 높지만, 아직도 처벌은 약하고 감형은 너무 쉽다. 죄질이 나빠도 여성단체 기부, 초범, 전과 없음 등을 이유로 형량을 깎아 주는 고질적인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성착취물을 내려받아 소지했지만 삭제했다는 이유로, 영상 속 ‘피해자 신원 특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감형한 사례도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성착취대응팀은 올 1~6월 대법원 판결서 인터넷열람 서비스에 등록된 성폭력처벌법 제13조, 제14조, 제14조의3, 15조 위반으로 처벌된 판결문 중 무작위로 추출한 618건, 청소년성보호법 제11조 위반으로 처벌된 판결문 중 무작위로 추출한 154건을 분석했다. 

여성단체 기부는 디지털 성범죄자들 사이에서 ‘감형 전략’으로 통한다. 일부 재판부는 아직도 이를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 및 재발 방지 노력”으로 평가한다. 불법촬영 범죄로 벌금형을 두 차례 선고받고도 아내와 장모를 포함한 여성들의 신체를 148차례 불법촬영한 남성은 “피해자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성범죄 피해자 지원 단체에 300만원을 기부한 점, 양육해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점, 피고인의 부모가 선처를 탄원하는 점” 등으로 감형받았다(수원지법, 5월 26일). 여성단체들은 대법원에 기부를 감경요소에 반영하지 말라며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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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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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범이라서, 형사처벌을 받은 적 없어서, 대학생이라서,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어서 같은 고질적인 문제도 여전하다. 편의점에서 불법촬영을 109차례 저질렀지만 초범이라(서울남부지법, 5월 26일), 범인이 갖고 있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파일 개수가 1만623개인데도 초범이라(대전지법 서산지원, 2월 5일) 처벌 수위를 낮춘 재판부도 있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내려받아 보고 스스로 삭제했다고 형을 깎은 사례도 있다. 대구지법 서부지원은 지난 3월 17일 텔레그램 ‘n번방’에서 아동·청소년 음란물을 판매하던 닉네임 ‘켈리’ 신모(32)씨로부터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3510개를 구매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반성하고 있는 점, 소지한 음란물을 다른 곳에 유포하지 않고 삭제한 것으로 보이는 점, 아무런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 등을 참작했다. 서울동부지법도 5월 14일 같은 이유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내려받아 본 남성에게 선처를 베풀었다. 

불법촬영을 했으나 유포하지 않고, 범행 발각 후 삭제했다고 감형한 사례도 있다. 수원지법 안산지원은 지난 4월 14일 여자화장실에서 불법촬영을 저지른 남성이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다” 등을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 범행을 감추고 수사를 피하려는 의도일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불법촬영 피해자의 신체 부위가 노출된 부위라서” 감형받아 벌금형에 그친 사례(창원지법, 2월 4일), “성착취물 속 피해자 신원 특정이 어렵다”며 감형한 사례(서울남부지법, 5월 21일)도 있다. 이를 두고 민변 소속 조은호 변호사는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와 권인숙 더불어민주당·장혜영 정의당 의원실이 8일 개최한 ‘n번방 방지법 제정 후 1년’ 현황 점검 토론회에서 “피고인이 의도적으로 피해를 줄이려 노력한 결과가 아님에도 유리한 정상으로 포섭했다”고 비판했다.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가 2021년 3월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n번방 운영자 갓갓의 무기징역 선고를 요구한다' 기자회견을 열고 현수막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가 2021년 3월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n번방 운영자 갓갓의 무기징역 선고를 요구한다' 기자회견을 열고 현수막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새로운 지적도 아니다. 이미 2020년 10월 20일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가 기존 디지털 성범죄 양형 기준의 문제점, △양형기준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중심이며 △초범, 처벌전력 없음, 진지한 반성 등이 감형 사유가 되는 점 등을 정리해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전달했다. 범죄의 심각성에 비해 사법부의 수용과 개선이 너무 늦다는 질책이 나온다. 

조 변호사는 “‘박사방’, ‘n번방’ 주범들에 징역 42년, 34년 등이 선고된 게 이례적인 판례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 성폭력 사건의 새로운 기준이 돼야 한다”며 재판부의 변화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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