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전광판에 종가가 표시되는 모습.  ©뉴시스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전광판에 종가가 표시되는 모습. ©뉴시스

 

주식 시장의 오래된 격언(?)을 들은 적 있다. 젊은 엄마가 아기를 업고 객장에 나타나면 이제 끝물이라는 속설이다. 주식 시장이 활황이라는 정보를 가장 뒤늦게 접한 이가 등장했으니 그때가 이른바 상투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한 주식 투자자는 냉철하고 똑똑하며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간다. 최신의 경제정보를 바탕으로 산업 트렌드와 구조, 신사업 전망, 기업의 재무제표를 꿰뚫고 있다. 각종 유튜브 채널에서 전무, 상무, 차장 직함을 달고 주식 전문가로 등장하는 증권맨들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남들은 이미 큰 수익을 볼 만큼 다 봤는데 그제서야 푼돈을 들고 주식 시장에 뛰어든 아기 엄마야말로 이들과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다.

재미있는 것은 부동산 투자자들에겐 정반대의 속설이 더 익숙하다는 것이다. 아파트를 살 때는 여자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미 너무 올라서, 정부 정책을 믿으니까, 대출이 부담스러워서, 남자(편)들이 주저하는 사이 아파트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그제서야 아내 말을 듣고 ‘그때’ 아파트를 사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것이다. 넥타이를 맨 금융투자자들과 달리 부동산 투자자들에게는 어딘가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비이성적이라는 그림자가 겹쳐 있다. 복부인이라는 오래된 표상이 상징하는, 부동산을 통한 자산증식에 탐닉하는 여성 투자자들의 모습은 바로 이 그림자와 가장 가까이 있다.

한쪽은 명백히 여성 투자자들을 비하하고 있고, 한쪽은 마치 여성 투자자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성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이성적 판단을 따르는 투자자가 아니라는 전제를 공유하면서, 자산증식 행위를 둘러싼 한국의 계급정치를 완벽히 탈젠더화하고 내부의 젠더 동학을 가리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최근 출간한 최시현의 주목할만한 저서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는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성역할 규범 속에서 여성들이 ‘더러운 일’이라는 윤리적 부담을 무릅쓰고 부동산 투자(주택 실천)를 감행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젠더화된 부동산 투자 문제를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

각종 투자 열풍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특히 주식이나 가상화폐 투자는 초기 자본이 많이 들지 않고 누구나 당장 시작할 수 있어 훨씬 일상적이다. 4월의 어느 날에는 도지코인 하나의 하루 거래대금이 코스피 전체 거래 대금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게다가 이 대열의 참가자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주식시장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올린 사람은 바로 30대 여성이고 40대 여성이 근소한 차이로 그 뒤를 이었다는 것, 그리고 꼴찌는 20대 남성이라는 보도가 나와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30~40대 여성들이 합리적으로 시장에 접근한 것과 달리 20대 남성들은 급등하는 종목을 좇아 불나방처럼 뛰어든 결과라고 한다. 그렇다면 올해 초 적금을 깨고 대출을 받아 삼성전자를 사들인 개미 투자자들을 두고, 저 오래된 주식 격언을 적용할 수 있을까.

전에는 없던 여성 투자자들이 최근에서야 대거 등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성이 언제나 경제적 주체라는 점은 자주 잊힌다. 노동시장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노동자인 동시에 사회재생산의 주요 축으로 시장경제와 긴밀히 관계 맺는 한편, 자산증식을 위한 투자 행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주체였다. 다만 성공한 부동산 투자자는 복부인으로 남고, 억대 수익을 벌어들인 금융 투자자는 시장을 보는 안목도 지식도 없지만 그저 운이 좋아서 성공한 것으로 표상되어 왔을 뿐이다. 개인 투자자들 사이에서 익숙한 밈이 하나 있다. 공중파 방송의 리포터가 중년의 여성 투자자에게 투자운용 비법을 묻자 이 여성이 대답한다. “감각으로 투자해요, 그래프도 볼 줄 모르고…” 그래서 이 여성이 벌어들인 수익은? “억대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감각으로 투자하는 여성 투자자는 드물다. 치열한 투자 시장의 한복판에서 경주하는 여성들의 경험담과 조언들이 아주 자주 들린다. 여기서 흥미롭게 관찰되는 것은 여성들의 투자 행위를 추동하는 새로운 동력으로서의 젠더다. 내 파이를 위해서, 여성일수록, 투자에 성공해서 누구에게도 의지 하지 않는 경제적 자유와 독립을 얻겠다는 다짐.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여성들이 빨리 이 대열에 동참하기를 권하는 것.

지난해였나, 트위터에서 ‘데미안을 100번 읽는 것 보다 주식 서적 한 번 읽는 게 삶에는 더 도움이 된다’는 멘션이 화제가 됐다. 여자들이 개인적인 성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생존에는 도움이 안 되는 책에만 몰입하는 모습이 답답해서 쓴 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여성들이 그러한 독서습관에서 벗어나 ‘읽어야 할 책’을 찾아 읽어야 할 때라고. 물론 이 멘션에 대한 많은 비판과 반박이 있었다. 하나의 해프닝처럼 지나간 일이지만 나는 이 말처럼 지금 현상의 단면을 잘 드러내주는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여성 투자자들이 시장과 국가와 경제와 어떻게 관계 맺고 있으며 그 모습이 페미니즘과 어떻게 조우하고 있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어낼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현상이 어찌 됐든 나는 우선 이 여성들의 건투를 빌겠다. 다만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두고 자신의 친구이자 길 안내자라고 했던 것을 떠올릴 때, 우리가 서로의 친구이자 길 안내자 역할을 기꺼이 자임하려고 한다면 데미안이 그렇게 쓸모없는 책은 아니지 않을까.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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