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독일 소설가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로
제5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
“내 소설이 난민위기 등 불평등 해소 계기 되길”

독일 소설가 예니 에르펜베크(55)가 25일 제5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기자간담회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은평구 제공
독일 소설가 예니 에르펜베크(55)가 25일 제5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기자간담회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은평구 제공

‘작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파고드는 작가. 개개인의 선택과 우연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섬세하게 포착하는 작가.

‘현대 독일문학 거장’으로 불리는 예니 에르펜베크(55)가 25일 제5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수상했다. 통일문학의 대표 문인 이호철(1932~2016) 작가를 기리고, 세계 분쟁·차별·폭력 등에 문제의식을 갖고 치밀하게 그려낸 작가들을 조명하고자 2017년 서울 은평구가 제정한 상이다.

유럽 난민 등 약자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온 에르펜베크 작가는 여성신문에 “더 많은 독자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소설로써 문제를 제기하는 게 내 일”이라며 ”사람들이 내 소설을 계기로 공감하고 행동하기를,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예니 에르펜베크 작가의 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한길사, 2018) ⓒ한길사
예니 에르펜베크 작가의 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한길사, 2018) ⓒ한길사

에르펜베크 작가는 냉전과 탈냉전 시대의 목격자이자 당사자다. 동베를린에서 태어나 23세 때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독일 통일, 소련 붕괴 등 ‘거대한 전환’이 평범한 시민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취재해 문학 활동의 밑천으로 삼았다. 역사적 비극의 급류에 뜻하지 않게 휩쓸린 인간 군상을 예민하게 포착했다는 평을 받았다.

1999년부터 저서 9권을 펴냈다.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불리는 ‘잉게보르크 바하만상’, 예술가협회 문학상, 졸로투른 문학상, 하이미토 폰 도더러 문학상, 헤르타 쾨니히 문학상, 리테라투르 노르트 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 독자들에겐 조금 생소한 작가다. 절판된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을유문화사)를 빼고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은 2012년작 『모든 저녁이 저물 때』(한길사)뿐이다. 

한 여성이 다섯 번 죽고 네 번 되살아나는 이야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나치 독일, 냉전 시대, 통일 독일까지 격동의 독일사를 무대로 한다. 주인공은 갓난아기 시절 숨 막혀 죽고, 자라서는 낯선 남성에게 살해당하고, 억울하게 스파이로 지목돼 처형당하고,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죽고, 치매를 앓다 요양원에서 죽는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남성들, 히틀러 시대에 가족을 잃고 취약한 상황에 내몰린 여성 등 당대 여성들이 처한 역경도 포착했다.

독특한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을 버무리는 솜씨,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 ‘막간극’을 끼운 뮤지컬 같은 구성, 시적이고 절제된 문장도 인상적이다. 대학에서 연극과 오페라 연출을 공부하고 유럽 오페라하우스에서 연출가로 활동한 이력이 엿보인다. 

김남일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선정위원장은 “20세기의 고단한 역사가 흘러가는 동안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관습과 율법, 폭력과 전쟁, 추방과 학살 등을 두루 견뎌낸 유럽 대륙의 생존자나 견뎌내지 못하고 죽은 자들에게 작가가 보여준 진지한 관심과 애정이 이호철문학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맞닿아 있다”고 평가했다.

에르펜베크 작가는 이날 수상소감에서 ‘역사의 거대한 전환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나쁜 경험을 하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 묻게 된다. 과거의 경험 중 무엇을 남겨둬야 하고, 무엇을 상실했나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작가 자신도 그랬다. 사회주의 동독에서 살다가 통일 후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동독 출신으로는 드물게 이름을 날린 작가’라는 수식어가 지금도 그를 따라다닌다. “통일 독일에서 동독 출신들은 외국인처럼 살았다. 새로운 규율을 배우고, 다시 직장을 구하고, 새로운 삶의 패턴을 그려야 했다”면서 “난민은 아니었으나 타인처럼 취급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모두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작가로 이름이 났다. 유럽 난민위기, 신자유주의 비판 등 진보적 목소리도 높여왔다. 그는 “불공평한 자원 분배, 국가 간 빈부격차 확대를 해결하려 노력해야 하나 국가 간 갈등이 이어지고 장벽이 들어서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독일 소설가 예니 에르펜베크. ⓒKatharina Behling/은평구 제공
독일 소설가 예니 에르펜베크. ⓒKatharina Behling/은평구 제공

2015년 독일 난민위기, 지금 벨라루스와 폴란드 국경에 갇힌 난민들의 인권 문제도 거듭 언급했다. 난민혐오가 들끓는 유럽 사회를 지켜보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17년작 『가다, 갔다, 갔었다』(Gehen, ging, gegangen)는 동독 출신 교수가 독일 내 아프리카 난민들과 만나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유럽에 간 난민들이 겪는 인권 침해 실태, 유럽 내 난민혐오 정서를 적나라하게 다룬 작품이라는 평이다. 작가가 직접 독일 난민수용소를 찾아 난민들을 만나 꼼꼼하게 취재했다.

에르펜베크 작가는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안온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집을 잃고 떠돌아야만 하는 사정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나. 그럴 때 누가 어떤 기준으로 우리의 인권이 보장돼야 하는지, 그렇지 않아도 되는지 판단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작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은 독자가 난민 문제 같은 보편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소설로써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내 소설을 보면 좋겠다”라고 했다. 또 “나는 역사로부터 영감과 흥미를 얻어 소설을 쓴다. 내 소설을 계기로 사람들이 공감하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나아가 정치적 변화를 촉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올해 펴낸 신작 『카이로스』(Kairos)는 1980년대 말 동독을 배경으로 50대 작가와 10대 제자의 아프고 괴로운 사랑 이야기를 통해 독일 현대사의 질곡을 그렸다. 한길사에서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