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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작가주의'에 육박하는
슬픈 트로트를 소화했던 심수봉.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여성 자작곡 가수(싱어송라이터)를 찾는 일은 의외로 힘들다. 보통사람들은 그저 자기 색깔이 아주 강한 가수, 특히 텔레비전 활동을 하지 않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면 으레 자작곡 가수려니 생각해버리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남자가수 중에서도 자작곡 가수의 티를 팍팍 풍기는 김광석과 윤도현도, 따지고 보면 히트곡의 대부분이 남이 지은 노래다. 우리가 흔히 자기 색깔이 확고한 언더그라운드 여자가수로 꼽는 양희은, 한영애, 장필순 등도 그렇다. 양희은은 가끔 작사를 하고 작곡은 안 한다.

한영애와 장필순은, 가수로 활동한 지 10년이 넘어서야 자신이 지은 작품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아직 충분히 자작곡 가수라고 보기에는 이르다. 이런 가수들은 매우 뛰어난 가창력과 작품 소화력을 지닐 뿐, 작가가 아니거나 아직은 충분치 않다. 그러고 보면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권진원과 이상은 정도이고,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자우림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1980년대까지는 거의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 볼 때 1980년대에 여성 자작곡 가수가 탄생해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심수봉이다. 게다가 심수봉은 트로트를 주 양식으로 삼고 있다. 트로트 분야에서 자작곡 가수는 더더구나 찾기 힘들다.

독자 여러분이 1980년대에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있다는 말에 기대감이 부풀어오르다가, 심수봉 이름이 나오는 순간 김이 팍 새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필 심수봉이라니! 특별히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지 않더라도 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여성이라면 심수봉에게 호감을 갖기는 매우 힘들다. 그의 '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한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말 못 해 나는 여자이니까'하는 <나는 여자이니까>를 들으면 분노가 끓어오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그녀의 인기곡 중 지나치게 교태스럽다는 점에서 좀 예외적이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어 창작자를 뒤져보니 다름 아닌 나훈아다. 오히려 그녀가 지은 노래의 대부분은 사랑의 행복, 사랑받기 위한 교태(이것이야말로 남자가 여자에게 바라는 태도다)보다는, 헌신적 사랑의 대가로 치르게 되는 고통의 몸부림과 자괴감으로 채워져 있다. 그 감정들은 유치하게 직설적인 듯하면서도 결코 상투적이지 않은 가사에 실려, (그런 태도에 동의하든 안 하든) 허를 찌르는 듯 충격을 던져준다.

198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이제 트로트는 더 이상 슬프지 않다. 가사의 내용에서는 '눈물' 어쩌구 하지만, 노래의 질감은 즐거움과 흥겨움, 향락성 일변도이다. 쿨하고 기교적이기만 한 주현미의 트로트, 온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향락적 느낌의 김수희 <남행열차> 같은 것을 생각해 보라. 이런 트로트에서는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슬픔이 없는 트로트는, 속된 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트로트의 핵심은 바로 극단적 비애이기 때문이다. 슬프지 않은 트로트만 나온다는 것, 더 이상 이미자 노래 같은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더 이상 이미자 노래 속 여자들처럼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 마디 못 하고' 바보같이 온갖 고통을 눌러 참고 속으로만 눈물 흘리고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파·트로트가 되지 않는 시대에, 심수봉은 절실하게 슬픈 트로트를 해내고 있다(그런 점에서 거의 작가주의에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시대착오적 노래가 왜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일까?아마, 우리 머릿속의 당위와 욕망이 당당하고 주체적인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아직도 우리의 가슴과 몸이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평소에 주체적으로 보이던 똑똑한 여자들이,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는 바보같이 질투와 애원을 반복하는, 꼭 1970년대 일일연속극 같은 꼴을 벗어나지 못하지나 않았는지. 심수봉의 호소력은, 바로 이 괴리를 파고드는 것이다.

“그래. 이렇게 남자와 사랑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란 말야, 내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이런 말을 하는 여자들이 많은 세상에 심수봉은 호소력을 발휘한다. '바보 같은 여자랍니다'나 '사랑밖엔 난 몰라' 같은 구절은, 바로 우리의 머리와 가슴, 당위와 현실의 괴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이다.

나는 결코 심수봉의 노래를 옹호하고픈 생각이 없다. 하지만 심수봉의 노래의 시대착오가 그녀의 잘못만은 아님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대착오적으로 움직여버리는 우리 자신의 몸과 가슴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는 그토록 인기를 얻은 것이다.

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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