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냈다, 향숙이가 누군지 알았어.”

저녁을 물리고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이 다급하게 입을 연다. “뭐가?”

시큰둥한 내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남편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향숙이, 향숙이 말이야.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살해되는 여자 이름이래.” 남편의 말을 되받아치듯 텔레비전에서 한 개그맨은 또 그 특유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향숙이'를 뱉어냈고 관중들은 깔깔깔 웃어댔다.

“그게 뭐가 그렇게 우습니? 처참하게 살해된 여자 이름이야. 그리고 그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고. 그게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니?” 흥분한 내게 지나치게 문제화시키는 것이 나의 문제라며 남편은 꾹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실종된 여학생이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채 하수구 입구에서 발견되었다. <살인의 추억>의 모방범죄로 추측된다며 뉴스는 보도하고 있었다. 순간 아찔했고, 이놈의 나라에서는 애 키워먹는 것도 어렵고 여자로 사는 것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향숙이라는 이름은 익숙해질 정도로 재미난 대사가 돼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밤길에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공포를 경험했을 것이고 참혹한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이승의 끝에 지금도 서 있을 것이다.

그녀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저 재미있는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상업주의의 비판뿐 아니라 여성을 대상화한 살인과 폭력, 그리고 그녀들의 죽음에 무감각해진 문화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는 폭력에 길들여져 있고 무감각하다. 어린아이들도 총과 칼이 장난감이 되어 '싸움'이 '놀이'가 되어버렸다. 싸우고 죽이는 일을 컴퓨터 '게임'으로 '놀이'삼아 하고 있다. 여성이 강간당하고 성적 유희의 대상이 된 음란물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제작, 유포되고 있고, 그것을 즐기는 소비층이 워낙에 탄탄해 음란물 제작업은 망하기는커녕 성업중이다.

집밖을 나서면 돈으로 여성의 성을 살 수 있는 매춘업소가 즐비하다. 싸우고 죽이는 일은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각자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다. 이러한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게 된 문화적 구조를 조금 더 소급해 보면 국가의 '정당한 폭력'이 있다. 법이 인정한다면 폭력과 살인은 가능하다는 논리는 폭력 자체에 대한 무감각증을 증가시켰다.

또한 이를 위한 물리적인 힘의 실천기구인 군대가 상설적으로 운영되면서 일반시민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의 저항감을 없애고 구체적인 폭력을 체화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더욱 큰 문제점을 야기시킨다.

우리나라는 국민 절반이 젊은 나이에 사람을 죽여도 좋은 훈련을 받는다. 법이 인정한 폭력이라 해도 폭력임에는 틀림없다. 그들의 무감각해진 폭력수위는 '향숙이∼'를 웃을 수 있게 했고, 또 다른 범죄를 재생산시켰다. 우리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향숙이∼'에 웃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죽음'이 우리 마음에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그러한 끔찍함에 무뎌진 감정은 다시 여리디 여린 여중생을 처참한 죽음으로 몰고 가고 말았다. 같이 웃음을 던진 것, 그것 자체도 이미 폭력이라는 사실을 고인이 된 여중생이 말해주고 있다. 우리 안의 폭력을 다시 절감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유성원 한양대 문화인류학 강사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