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가족은 셋인데 식구는 둘이다. 아직 독립을 하지 않은 셋째가 분명 함께 살고 있기는 한데 집에서 한 끼도 밥을 안 먹는다. 얼굴도 보기 힘들다. 새벽에 들어왔다가 옷만 갈아입고 나가는 지가 한참 된다.

(너, 그 직업 갖고 장가가기는 다 틀렸다, 요새 어느 여자가 그런 결혼생활 참아 주겠냐?고 했더니 셋째 왈, 왜 싫어해요? 월급 꼬박꼬박 들어오지, 집에서 밥 안 먹어 주지 얼마나 좋겠어요, 라고 한다. 아니, 아직 어린 놈이 여자의 깊은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거야?)

끼니거리가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역정을 낼 이야기이겠지만 두 식구가 하루 세 끼 챙겨 먹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요즘 초미의 관심사라는 '잘 먹고 잘사는 법'은커녕 '그저 대충 먹고 대충 사는 일'도 내겐 버겁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밥 해 먹는 일쯤은 일도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다섯 개씩 싸야 했던 적도 있었다. 어느 새 아이들과 얽혔던 그 많던 번거로운 일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사는 게 아주 단순해졌다. 이제 여생의 중차대한 과제로 대두된 것이 밥 먹는 일이다.

'잘 먹고 잘살기' 힘드네

평생 부엌일을 좋아하시던(아니, 좋아하시는 것처럼 보였던) 내 어머니도 인생의 어느 즈음부터는 끼니때가 다가오면 한숨부터 쉬셨다. 뭘 해 먹을지 모르시겠다는 거였다. 물론 그 말 속에는 아버지만 안 계시다면 아무렇게나 때울 텐데, 라는 가벼운 투정이 스며 있었다.

그러면 명색이 맏딸인 나는 50년을 해온 밥을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귀찮아 하냐고 퉁명스럽게 받았다. 정말 얌통머리 없는 짓이었다(엄마, 죄송해요).

그러던 나는 밥해 먹기 역사 30년 만에 손을 들었다. 세상에, 밥 해먹는 일이 갈수록 새삼스럽고 귀찮다.

어쩌다 둘 다 바깥 일이 없어 연속 이틀을 함께 집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경우 밥 먹는 일은 엄청난 과제로 다가온다. 도대체 매끼 무얼 어떻게 먹어야 한단 말인가.

다행히 이제는 하루 세 끼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얼마 전부터 아침은 빵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줄기차게 밥과 국 그리고 가끔은 고기까지 볶아 먹었던 거창한 아침식사가 아주 간단해졌다. 빵은 간식거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신토불이 식성도 개혁에 성공한 거다.

이틀에 한번 꼴로 동네 음식점 순회

반면 점심은 무조건 전통 고수다. 밥을 새로 짓고 국을 끓이고 가짜굴비라도 굽고 말하자면 '제대로' 먹는다. 귀찮아도 우선 내가 먹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저녁이다. 똑같은 반찬을 먹자니 물리고 새로 만들자니 귀찮다.

이 때부터 슬그머니 남편에게 눈총을 준다. 남편만 없다면 아무 거나 대충대충 때우고 넘길 텐데 라는 생각 때문에 괜히 심술이 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정말 웃기는 짓이다. 있는 남편을 '없다면'이라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의 극치이며 남편이 없다해도 대충대충 때우는 건 답이 아니다.

하지만 남편이 불만스러운 건 사실이다. 둘이 함께 늙어가는 처지에 왜 나만 밤낮 밥 걱정을 하느냐는 말이다. 젊었을 땐 그렇다 쳐도 언제까지 '여자이기 때문에' 밥을 대령해야 하냐고요. 벌써 몇 년 전부터 남편에게 하루에 한 끼만이라도, 뭘 사오든지, 뭘 끓여 먹든지 당신이 해결해 주면 정말 고맙겠다고 그토록 신신당부했건만 이 남자, 요지부동이다.

겉으로 말은 안 하지만 혹시 아내한테 밥 독촉하지 않고 반찬투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좋은 남편노릇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건 아닌지. 그래서 나온 해결책. 우리 부부는 마치 한 쌍의 잉꼬처럼 이틀에 한 번 꼴로 동네 음식점을 순회한다.

동네가 워낙 번잡하다 보니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기만 하면 싸고 맛있는 음식점이 널려 있다. 칼국수, 추어탕, 설렁탕, 베트남 쌀국수에 감자탕, 비빔밥집까지. 그야말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너무 자주 먹다보니 외식도 물린다. 아무래도 집에서 먹는 것만 못 하다.

남편은 말한다.

“당신이 해주는 게 제일 맛있어.”

나도 말한다.

“당신이 해주는 밥을 먹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오늘 저녁도 우리 부부는 서로 다른 꿈을 꾸면서 전라도식 콩나물 국밥을 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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