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이야기]
이옥남 진실화해위 위원
어머니 문태임 씨

택배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내용물은 호박, 대추, 생강을 짜서 만든 건강식품, 보낸 사람은 이름만 들어도 애틋한, 올해 여든이신 우리 어머니 문태임 여사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산업화, 민주화를 모두 겪은 이른바 ‘묻지마 세대’이자 일생동안 갖은 고생을 다하신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어머니 중 한 분이시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여느 부모처럼 자식 교육을 최상의 가치로 삼으셨던 부모님은 2남 3녀를 모두 대학에 보내셨다. 우리 중 한 명은 석사, 두 명은 박사까지 마쳤다. 자식들은 장성해서 각자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직접 담근 고추장, 김치 등 각종 음식과 농산물을 1년 내내 자식들에게 보내는 게 일상이 되셨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가슴 뭉클한 존재이자 사랑과 헌신의 대명사다. “신은 자신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어머니를 대신 보냈다”는 말이 있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에 버금가는 존재는 신밖에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위대한 존재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절대적 존재겠지만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이 같은 색채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장남인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시어머니께서 일찍 별세하시는 바람에 시동생들과 자식들을 동시에 돌보고 키워야 하는 고된 인생이 시작됐다. 내가 태어났을 때 삼촌들은 결혼해서 출가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2남 3녀의 자녀들로 구성된 대가족을 보살피는 일은 여전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내가 태어난 경남 하동은 인근에 남해, 삼천포, 사천 지역이 가까워 풍부한 해산물과 농산물이 나는 곳이다. 음식 솜씨가 남다른 어머니는 동네 경조사나 지역 행사가 있으면 단골 요리사로 초청될 정도로 인기가 좋으셨다. 어릴 적 5일장이 서면 각종 싱싱한 식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셨다. 여름이면 마당에 모기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어를 구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때가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사십대 후반인 내가 아직 큰 병 한번 앓지 않고 건강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어릴 때 어머니가 좋은 음식으로 건강을 챙겨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내게 솔푸드(soul food 또는 comfort food)를 꼽으라고 하면 유년 시절 어머니께서 만들어준 꼬막장, 갈치조림, 추어탕, 갈비 등 각종 음식이 줄줄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학교 소풍이나 운동회 등 행사 음식도 책임지셨고, 다른 어머니들과 함께 천을 떼다가 교실 커튼을 직접 만들어 주시는 등 학교 미화에도 적극적이셨다. 요즘 학교에서는 사라진 광경들이다.

가세가 기울었을 땐 어머니는 연약한 몸으로 생활전선에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5명의 자녀는 서너살 터울로 거의 동시에 성장하고 진학했다. 2명 또는 3명이 동시에 대학생인 적도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벌이로는 등록금 마련도 벅찬 일이었다. 그때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도와 자식 열 일 마다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항상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냐며 우리 다섯 한 명 한 명에 극진한 정성을 쏟으셨다.

나는 개인사정으로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음산한 날씨, 한국과의 12시간 시차, 특히 오후 4시만 되어도 어두워지고 비바람 몰아치는 우울한 겨울 날씨는 힘든 유학생활을 몇 배 더 가중시켰다. 유학 첫해 몸살감기를 심하게 앓았고 이를 아시게 된 어머니는 우체국 특송으로 보약, 햅쌀, 김치와 밑반찬을 긴급 공수해 주셨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음식과 택배상자 밑에 놓인 어머니의 손편지를 받고 한 없이 울었다. 편지는 ‘엄마가 막내딸에게’로 시작됐다.

“옥남아. 엄마가 몇 자 적어 보낸다. 네가 떠난 지도 두 달이 다 되어 가는구나. 그동안 어떻게 지내는지 엄마는 너무 궁금하구나. 넉넉지 못한 생활에 얼마나 고생이 많은지 안 봐도 잘 헤아리고 있단다. 잠이나 들면 잊을까 잊지 못하는 막내딸아. 그러나 고생 끝에 행복이 오겠지. 엄마는 너의 용기가 너무 자랑스럽구나...중략...할 말이 너무너무 많았는데 이만 줄인다.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서라도 너의 얼굴 보고 싶구나. 대한민국 코리아에서 그리운 막내딸에게”<사진>.

 

 

한 마리 새가 되어서라도 자식을 보고 싶은 진한 모성애에 이억만리 타국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영국에서 맛보는 어머니의 음식은 보약 중 보약이었고, 당시 어머니의 손편지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유학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해서 제일 먼저 고향으로 갔다. 사천 공항으로 마중 나온 어머니의 모습에 또 한번 눈시울을 적실 수밖에 없었다. 유학 전 어머니는 중년여성의 외모였는데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 노쇠한 여성이 되었고, 포옹한 어머니의 어깨는 너무 야위고 허약해서 당황하고 놀랐다. 알고 봤더니 내가 유학하는 동안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었고 부모님은 걱정할까봐 자식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일을 수습하셨다. 영국 유학과는 비교도 안되는 불상사를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묵묵히 감당하신 것이다.

항상 궁금했다. 나는 나 하나 건사하는 인생도 힘들고 고달픈데 어머니는 어떻게 그 무거운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힘든 인생 여정을 지나 오셨을까? 어머니는 지금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시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시는 일에 열심이시다. 60세에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70대 중반에 요가를 시작하고, 70대 후반에는 서예를 시작해 각종 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초혜(草惠)’라는 호도 받으셨다. 매 순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온갖 역경을 겪고도 긍정적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사랑은 가족과 자식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지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담대한 용기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제일 먼저 어머니를 찾고, 어머니는 항상 우리 막내딸 힘내라고 격려해 주신다.

어머니의 삶에 자식들에 대한 헌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 이웃과 지역사회에서도 불우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시는 법이 없다. 연세가 많으시지만 분별력과 총명함은 여전하시다. 당신도 노인이지만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봉사도 하고, 가끔 서울에 오실 때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장애인이나 어려운 분이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당신 몸을 돌볼 여유 없이 가족에만 헌신하셨던 어머니 몸은 이제 성한 곳이 없다. 척추협착증으로 인한 허리 수술, 녹내장 수술, 불편한 치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한쪽 팔.....

어머니는 자식들에 모든 것을 내어 주고 껍데기만 남으셨다. 그래도 어머니의 사랑은 끝이 없다. 오늘도 자식 걱정이 먼저인 어머니께 효도다운 효도 한번 못한 죄책감이 새삼스럽게 밀려온다. 문득 공자의 말이 떠오른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孝)而親不待(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효)이친부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이 봉양(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자식이 손쉽게 효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부모님께 안부 전화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오늘 저녁 어머니께 겸사겸사 안부전화 드려야겠다. ”엄마. 택배 잘 받았어요.“ 그리고 ”사랑해요“라는 말도 잊지 말아야겠다.

이옥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

*이옥남 
경희대 국제관계학 박사. 통일연구원 대외협력팀장,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치실장 역임. 현재, 대통령직속 자치분권위원회 위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 천안함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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